홍대용(洪大用, 1731-1783)
1. 한반도의 18세기 지성사에서 담헌 홍대용만큼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가 또 있을까? 당대 지식인들은 정치나 문장 혹은 경학經學)으로 이름을 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홍대용은 이와 달리 ‘자연철학자’라 명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에다. 담헌의 학문적 관심과 문제의식은 매우 포괄적이면서 총체적이다. 그만큼 다방면의 지식과 기술을 가진 지식인은 드물다. 그의 관심사는 이기(理氣), 심성 문제에서부터 경학, 사론(史論), 산수, 천문, 율력, 직관(職官), 전부(田賦), 교육, 용인(用人), 병제, 성제(城制), 병법 등의 문제에 걸쳐 있다. 음악에 대한 관심 또한 남달라 전문가 수준으로 연주 실력을 뽐냈다. 거문고, 퉁소 연주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서양금은 스승 없이 혼자 연주법을 터득했다. 북경에서 천주당을 방문했을 때 처음 본 파이프오르간을 연주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다. 수학과 음악은 한 분야라고 하지만, 담헌은 수학, 천문, 음악에 있어서 뛰어난 전문가였던 것이다. 그는 가장 긴 과학서(1만 2천자)라는 칭송을 듣는 『의산문답』을 통해 지원설(地圓說)·지전설(地轉說)·우주무한설을 증명했고, 천문대인 농수각을 짓고, 천체를 관측하는 혼천의(渾天儀)와 자명종 같은 기구를 만들어 정밀한 측정을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주해수용』에서 산수·기하에 관한 논증을 통해 일상의 편리를 추구했다.
2. 담헌 홍대용은 박지원의 경우처럼 노론 명문가의 후예다. 조부 홍용조는 대사간,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했고, 아버지 홍력도 나주목사를 지냈다. 담헌이 천안 수촌에 농수각(籠水閣)을 짓고 호남의 실학자 나경적에게 의뢰하여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할 때, 그리고 연경여행 때도 그 비용을 아버지가 지원해주었다. 넉넉한 가정 형편에, 지명도를 갖춘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담헌은 12살에 노론 산림으로 낙론의 종장이었던 미호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제자가 되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곳 석실서원에서 과거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자기실현을 위한 학문을 연마했다. 담헌은 몇 차례 과거를 보았지만 수험공부에 뜻이 없어 번번이 낙방했다. 담헌은 다만 우주의 이치와 세상의 이치를 더불어 탐구하고, 시문을 즐기고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자족적인 삶을 살았다. “아! 물아일여(物我一如)가 이뤄졌는지도 모르는데, 귀천과 영욕(榮辱)인들 논해 무엇하랴? 잠시 살다 죽는 것은 부유(蜉蝣)의 생애보다 못하도다. 아서라, 내 뜻대로 즐기며 이 정자에 누워서 이 몸을 조물(造物)에 맡겼다.”(<건곤일초정주인>,「내집」3권, ,『담헌서』)
3. 담헌은 일찍부터 천문역학에 경도되었는데, 낙론계 일각의 학풍이었던 김석문(金錫文) 계통 상수학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석문(1658-1735)은 김창흡의 문인으로 『易』과 『성리대전』를 연구하고, 태양·지구·달이 공중에 떠있으며 지구도 달처럼 회전한다는 삼대환공부설(三大丸空浮說)이란 획기적인 천문학 이론을 수립하여 김원행에게 크게 인정받았다. 김원행의 제자로 담헌과 교유했던 황윤석도 상수학에 일가를 이루었으며, 김원행은 상수학 연구를 장려했다고 한다. 담헌의 학문 경향이 천문과학과 상수학으로 기울었다고 그가 탈성리학, 탈유학을 주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떤 순간은 성리학자였고, 어떤 순간은 양명학적이고, 육구연적이고, 장자적이었다. 그 어떤 경지이든 담헌이 강조한 삶의 자세와 학문의 태도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자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실천’이었다.
4. 이런 담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은 연행(燕行)의 경험이었다. 청나라라는 궁리(窮理)의 현장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나이 36살 때인 1765년(영조41), 숙부 홍억이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임용된 덕분에 그 子弟裨將으로 북경에 다녀오게 된다. 이를 계기로 담헌의 세상은 완전히 변전한다. 청나라라는 선진의 공간과 그 사람들과 마주침으로써 완전히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게 된 것이었다. 담헌의 연행은 뜻밖의 행운만은 아니었다. 담헌은 이미 여행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몇 해 전부터 이미 노가재 김창업의 『燕行錄』을 읽었으며, 홀로 중국어를 익히고 있었다. 노가재의 <연행록>은 조선의 선비들에게 청나라의 풍광과 문화에 대한 신선함과 호기심을 자극하여 특히 노론계열 젊은이들에게 한번쯤은 청나라 외유를 꿈꾸게 만들었다. 그 이후 연행객들은 노가재의 『연행록』을 읽고, 그가 보았던 것을 보고자 노력했다. 담헌도 마찬가지였다. 호기심도 많았고, 서양의 천문역학 기구를 직접 관찰하고 싶었던 담헌은 이미 외유할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노론 명문가의 자제로, 충분히 갈 수 있었던 여건을 갖추었기에 담헌은 한어를 배우면서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오래 전부터 한번 외유할 뜻을 가지고 있었기에 여러 가지 역어를 보면서 말을 익힌 지도 여러 해가 되었었다. 그런데도 책문에 들어갔을 때, 비록 보통으로 하는 말까지도 전연 알아듣지 못하여 당황하고 답답하였다. 이때부터 수레를 타게 되면 왕문거와 하루 종일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여관에 들어서는 주인 남녀와 억지로 말머리를 끄집어내어 끝없이 이야기해 왔으며, 심양에 이르러서는 조교 부자와 별별 이야기를 다하면서도 필담은 하지 않았다. 북경에 있을 때에는 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일이 닥치는 대로 이야기를 주고받아, 말의 억양이 더욱 익숙해졌었으나 오직 문자나 깊은 말, 그리고 남방 사람들 말에는 망연하여 귀머거리나 벙어리 같았다.
(<연로기략>, 외집, 8권 <담헌서>)
준비된 여행객 담헌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청나라와 만났다. 만주사람을 만나면 만주말을 한두 마디라도 익히고, 몽고사람을 만나면 몽고말을 한두 마디라도 익혔다. 위축되거나 자만한 모습이 전혀 없었다. 오랑캐라는 선입견으로 미리 깔보고 지나치는 것이 없었다. 담헌은 청나라에 대한 어떤 선입견도 없이 그들의 문명과 접속했다. 뭐든 물어보고 확인하며 청나라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해갔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보고 듣고 깨달을 것을 그대로 전했다. 그것이 바로 북경 여행을 기록한 《연기》이다. 담헌이 쓴 《연기》는 청나라를 편견 없이 바라본 최초의 여행기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5. 담헌은 1765년 12월 연경을 향해 길을 떠났다. 서울에서 의주까지 1천 50리, 의주에서 연경까지 2천 61리를 왕복했다. 담헌은 동지사의 일행이었지만 개인 수행원 자격이었기에 자유롭게 청나라의 곳곳을 마음껏 보고 즐길 수 있었다. 그 여행기가 <연기(燕記)>, 그것이다. 그의 연하 동무인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유명세에 비교할 때 이 책은 너무나 알려져 있지 않은 게 안타깝다. 나(k)는 이 두 권의 연행록을 다 읽었지만, <연기>에서도 <열하일기>에 못지 않은 재미와 정보, 그리고 삶의 지혜가 넘쳐난다. 더구나 해학과 기지의 명수인 박지원의 글과는 다르지만 책의 곳곳에서는 웃음-코드가 싱둥싱둥하게 살아 있다.
6. 담헌은 이미 1721년에 연행(燕行)하였던 노가재 김창업의 발자취를 참고했다. 그의 연행록에는 미지의 장소를 탐사하려는 집요함이 진지하게-우스꽝스레 그려진다. 그는 진정 길 위의 사람이었다. 만리장성의 끝, 망해정(望海亭)을 오른 그는, 마치 대륙의 광막(廣漠)에 눈시울을 붉혔던 연암처럼, 감격 속에 머리털이 뻗치는 것을 체감한다. <의산문답>의 허자(虛子)처럼 그는 우물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반도 안에서 말로만 천하를 논하였지만, 그 실제와의 거리는 천양지차였다. 새롭게 숨을 쉬고 있는 선진의 청나라가 그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미 ‘오량캐 청라나’가 아닌 것이다. 연암의 동무가 아니라고 할까봐, 그의 글 속에는 근엄한 선비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산에서 마주친 여인에게 길을 묻자고 하다가 생긴 일화 한 토막.
수십 보 밖에 여자 하나가 여남은 살 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광주리를 끼고 나물을 뜯다가 놀라 일어나 살피며 바라보는 중이었다. 길을 묻게했지만, 여자는 깜짝 놀라 아이와 함께 광주리를 버리고 달아났다. 소리쳐 부르며 뒤를 쫓으니, 더욱 죽자고 갈팡질팡 도망했다. 아이는 먼저 달아나 버리고, 길을 물으려니까 여자가 황급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길바닥에 오줌을 질펀히 누어 놓고는 소리를 지르며 울며 달아나 버렸다.
7. 청나라의 심장부 연경은 다른 곳과 달리 출입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문금(門禁)이 심해서 자유롭게 유람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담헌은 명분에 얽매인 고루한 선비와 달리 이 난경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뇌물을 쓴다. 당시에는 통역관을 통해서 은화뇌물을 먹이는 게 관행이었던 것이다. 또한 담헌이 미리 중국어를 열심히 준비한 것도 연행의 고비고비에서 좋은 결실을 낳기도 하였다. 연암을 비룻한 연행객들은 대체로 필담(筆談)을 나누었는데, 담헌은 비록 문어체였지만 어느 정도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에 청의 문화와 문물에 접근하는 데에 적지 않은 장점이 되었다.
8. 담헌은 북경에서 천주당을 방문한다. 명나라 신종 때 마테오 리치가 북경에 들어온 이후 천주교 신부들이 계속해서 들어오자 강희제 말년에 청나라 조정에서는 신부들이 살 천주당을 북경의 동서남북 네 곳에 지어주었다. 담헌이 천주당을 방문한 이유는 분명했다. 서양에 대한 호기심도 호기심이거니와 혼천의를 제작했던 천문학자로서 천주당의 서양 신부에게 천문과 역법에 대해 배우고, 서양과학기술과 기구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기실 조선사신단 대부분이 그랬듯 담헌 또한 천주교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강희제 연간 이후로부터 우리 사신이 연경(燕京)에 가면 서양 사람들은 매우 기꺼이 맞아들이어 신상(神像) 및 기이한 기구(器具)들을 보여주고, 또 서양에서 생산된 진이(珍異)한 물품들을 선물로 주었다. 자명종, 세계지도, 혼천의 등의 과학기구들은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이해는커녕 이단이라 무시하여 예의도 갖추지 않고 기물은 더럽히는 조선인들의 태도에 대해 담헌은 안타까워하거나 나무란다. 담헌은 배우려는 겸허한 자세로 신부들과의 교우를 이어간다. 담헌은 세 차례 천주당을 찾아간다. 그 덕분에 담헌은 천주당의 성상과 벽화를 자세히 관찰하고, 파이프오르간도 연주해보고, 이런저런 천문기구도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유송령 신부로부터 별자리의 운행, 지리, 천주교의 신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9. 이외에도 담헌은 성곽, 자연, 음식, 의복, 병장기, 수레, 온돌, 연극, 마술 등등 청나라의 온갖 기이한 풍물, 번성한 문물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담헌에게 청나라는 야만의 나라가 아니라 조선과는 다른 나라로서 낯설고 신기할 뿐이었다. 이상하고 신기한 나라! 청나라는 담헌에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담헌의 머릿속에는 청나라에 대한 고정된 인식 틀이 아예 없었다. 길 위를 횡단하며 자신이 직접 목격하며 느꼈던 그 모든 것이 청나라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연기』를 보면 담헌은 청나라를 기술하는 일에 있어 몸을 사리지도 않고 축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과장하지도 않는다. 무시하지고 않고 계몽하지도 않고. 청나라의 문명을 본 그대로, 느낀 그대로 쓸 뿐이었다. 참으로 담담하게! 담헌의 편견 없는 시선 덕분에 편협된 청나라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곳으로 현실화되었다. 그것은 조건반사적으로 야만과 오랑캐의 땅으로 표상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조건 현혹되지도 않았다. 담헌에게 청나라는 만주족, 한족, 몽고족, 회회족, 위그르족 등이 뒤섞여 살아가는 또 하나의 문화이자 생활의 터전이었다. 담헌은 그 생활의 현장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진솔하게 이야기했다. 여느 나라나 그렇듯 청나라 문명에는 빛도 있었고 그림자도 있었다.
10. 북경의 유리창(琉璃倉)은 조선의 선비들을 놀라게 한 대표적인 명소 중의 하나다. 서적과 솥, 宗廟祭器, 골동품 등 온갖 보배스럽고 괴상하고 기이하고 물건들이 넘쳐흐르는 길을 따라 걸어가면 마치 페르시아(波斯)의 보물 시장에 들어간 것처럼 그저 황홀하다. 서점 안의 책은 수만 권에 이르고 보는 것만으로 현기증이 돈다. 게다가 거울 가게에서는 천백 개로 나눈 몸이 벽에서 들여다보는 것 같아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그러나 담헌은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여기에 현혹되지는 않는다. 문명의 審級은 번화한 시가지와 화려한 물건들로 따질 수 없으며, 오히려 백성들의 생활과 일용에 필요한 물품이 문명지수이다. 유리창을 아무리 돌아보아도 그 많은 물건 중에 백성들의 양생(養生)과 송사(送死)에 쓸 수 있는 일용품은 거의 없다. 사치스런 물건에 빠져들면 방탕을 일삼아 선비의 뜻과 기상을 잃게 될 뿐이다. 담헌은 문화적 화려함이라는 외관에 사로잡히지 않고 청나라의 속내를 살피려 애썼다. 담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1. 담헌 홍대용은 친구 사귀기의 달인이다. 朴趾源, 정철조, 나경적 등 조선에 여러 사우(師友)들이 있었지만, 담헌의 친구 사귀기는 중국에서 빛을 발했다. 이역만리 하늘 끝(天涯)에서 지기(知己)를 만든 행위만으로도 담헌은 당당히 18세기 지성사에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燕記』를 보면 그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아주 많아 누구와도 이야기를 시도했다. 종친 유군왕의 작은 아들이자 康熙帝의 曾孫인 서른 한 살의 양혼, 한 학당의 訓長인 주학구와 그 학생들, 자신의 車夫였던 17살의 왕문거, 통역관 서종현·서종맹·박보수·오림포·쌍림, 自鳴鐘 수리점 주인 및 여러 점포 주인들 등등. 심지어 서종맹이나 박보수와 같은 엄격하고 사나운 사람조차 내 편으로 만드는데 뛰어난 기술이 보인다. 담헌은 상대방을 대화로 끌어들이는 기술을 타고난 듯하다. 술도 좋아하지 않고, 시를 읊지도 않고, 食貪도 없지만, 사람들은 담헌의 깍듯함과 편견 없는 질문에 무장 해제되었다. 담헌은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았으며 어떤 이와도 대화를 텄다. 선입견 없이 사람에게 다가가 그 사람을 알려고 노력했다. 燕京으로 떠날 때부터 담헌이 크게 원한 바는 “마음이 맞는, 한 명의 아름다운 선비와 만나 실컷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담헌은 청나라의 곳곳에서 사우를 만나고자 적극적으로 청나라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그들의 집을 방문했다.
12. 담헌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이기성의 안경을 구입하기 위해 유리창에 갔다가 항주(杭州)의 선비 철교 엄성과 추루 반정균과 조우한 것이다. 두 사람은 과거를 보러 북경에 올라온 참이었다. 둘 다 안경을 끼고 있었기에 이기성은 쓰고 있는 안경이라도 팔라며 이들을 조른다. 이들은 뜻밖에도 일면식도 없는 이기성을 위해 안경을 벗어 주고, 돈도 받지 않았다. 안경을 구하는 사람이 자신들처럼 눈에 병이 든 사람일 텐데, 어찌 돈을 받을 수 있냐며 그냥 벗어준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담헌은 우아하고 사랑스런 선비들이라 여겨, 교제하기를 청했다. 한 묶음의 全智, 부채, 묵, 淸心丸을 선물하며 교제를 구했더니, 이들은 공손히 예의를 갖춰 받으면서 답례로 깃털 부채, 필묵, 茶器 등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담헌과 항주 선비들의 기이한 우정이 시작된다. 담헌은 이들과 만나면서 한 사람의 지기를 더 얻었으니, 소음 육비였다. 담헌은 36살, 엄성은 35살, 반정균은 25살, 소음 육비는 48살이었다. 엄성은 이때 담헌과 몇몇 조선사신의 초상화를 그린 것이 여태까지 전해진다. 담헌은 특유의 친화력과 호기심으로 중국인 선비들과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했다. 한 번 만나면 날이 다 가야 파했다. 그리고 필담으로 대화를 했기 때문에 담화할 때는 피차에 거의 손을 멈추는 일이 없었다. 서로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이 너무나 많아 소통하기에 급급했으므로, 이들의 필담은 난잡하고 차마 次序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하루에 나눈 말이 만 마디가 넘을 정도였다니, 이들의 모임이 얼마나 활기차고 즐거웠는지 짐작이 간다.
13.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 담헌은 항주 친구들과 나누었던 필담을 묶어 『건정동필담』을 펴내었다. 그리고 사신단이 파견될 때마다 인편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편지를 모은 것이 『杭傳尺牘』이다. 연행의 길 위에서 만난 여러 선비들과 우정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담헌은 우물안 개구리의 시야를 넓히려고 노력했다. 담헌은 북경의 건정동에서 진정 인종, 지역, 학벌, 지위의 모든 것, 즉 세력과 이해를 뛰어넘는 평등한 관계를 맺었다. 오히려 그런 경계를 허물고 조건 없이 마주했기에 이들의 우정은 평생토록 지속되었다. 이들은 계산도 없었고 서로 꺼리거나 숨기는 것도 없었다. 이들의 만남은 천진난만함 그 자체였다. 그랬기에 이역만리 머나먼 곳에서 편지로만 소식을 전하면서도 우정은 더욱 깊어만 갔다. 그냥 소식을 주고받기만 한 게 아니었다. 善으로 인도하고, 仁으로 보완해 주는 사이, 그야말로 사우로써 최선을 다했다. 담헌은 과거에 낙제한 엄성에게 오히려 축하 인사를 보내며 명성과 지위에 연연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 편안하고 담담하게 살라고 권한다. 엄성은 담헌의 진심에 감응한다. 하지만 청나라 선비들과의 교류는 담헌이 좁은 조선 땅에 돌아왔을 때 문제가 된다. 비방이 난무했다. 그 당시의 재상인 김종수의 동생이자 담헌의 친우 김종후는 편지를 써서 담헌을 심하게 나무라기도 했다. 김종후는 철저히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논리를 견지했다. 담헌은 김종후의 그 꽉 막힌 사고방식에 절대로 굴하지 않았다. 오랑캐가 된 것은 지계(地界) 때문이지 사람이 원래 오랑캐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랑캐 땅에서 살아도 성인이나 대현이 될 수 있는 법. 이 속에 숨은 뜻은 우리나라 사람이 오랑캐가 아니듯, 청나라의 사람들도 오랑캐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랑캐를 나눈 것은 그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고 때문이지, 자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랑캐는 없는 것이다. 중화와 오랑캐라는 척도를 해체해버리는 논법. 그러므로 오랑캐처럼 살면 오랑캐지만, 오랑캐 나라로 일컬어지더라도 성인처럼 살면 오랑캐일 수 없다. 담헌에게는 만주족도 한족도 사람됨에 따라 다른 것이지, 종족에 따라 사람이냐 아니냐를 따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렇듯 오랑캐가 아닌 중국을 다스리는 청나라의 현재를 제대로 보게 한 공로가 담헌에게 있었다. 담헌은 청나라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거기엔 어떤 선입견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무엇을 사유하는지를 살폈다. 그리하여 담헌은 北伐이 아니라 北學을 외칠 수 있는 계기를 열어주었다. 이후 朴齊家와 박지원의 북학 논의는 홍대용으로 인해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박제가는 중국에 다녀온 홍대용을 이렇게 묘사했다. 천애의 지기들이 담헌을 이렇게 바꾸었다.
14. 담헌 홍대용에게 중국 여행의 후폭풍은 상당히 거셌다. 항주 선비들과의 필담을 묶어 편찬하고, 여행기를 쓰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중국 여행은 담헌의 사유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박제가에 의하면 청나라에서 돌아와 담헌은 數理와 기하 연구에 완전히 몰입했다고 하는데, 『籌解需用』이라는 수리학 책의 편찬은 그 결과물이었다. 담헌은 또 실용적 지식을 정리하는 일에 머물지 않았다. 중국에서 얻은 깨달음으로 인하여 천문과학의 이치를 궁구하는 동시에 이것으로 세상의 이치까지 꿰뚫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 결산물이 『醫山問答』이다. 『의산문답』은 중국과 조선의 경계에 놓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한다. 이 경계지대에서 마주친 虛子와 ‘實翁’의 대화를 문답체로 구성한 ‘과학-철학’ 책이다. 담헌은 성리학의 관념 追隨主意를 배격한다. 현실은 무시한 채 형이상의 성(性)이니 도(道)니 명(命))이니 리(理)를 탐구하는 것은 나라에도, 우리의 삶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근원에 대한 연구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근원만 쫓아 삶의 문제는 망각해버린 작금의 사태를 비판하는 것이다. 현실의 지평은 사라지고 관념만 쫓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허학이다. 담헌은 성리학의 道나 天理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흩어져 있는 삶의 이치이자 원리이지, 하늘 저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이념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 삶을 어떻게 가꿀 것인가의 이치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 유용한 것들을 궁구해야만 한다. 현달한 벼슬아치로 살든, 물러나 궁핍한 선비로 살든, 공부하는 사람이 할 일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도, 실용적인 지식을 탐구하는 일도 모두 이 땅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과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