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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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총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한 편을 소개합니다. 《용재총화》는 조선 성종 때 성현(1439~1504)이 쓴 패설집입니다.
홍기문 김찬순 번역으로 출판사 보리에서 나온 『거문고에 귀신이 붙었다고 야단』의 394~395쪽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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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문과의 최종 시험에서 셋째로 뽑힌 사람을 탐화랑이라고 하는데, 급제한 사람의 명단을 발표할 때 탐화랑이 임금 앞에서 꽃을 받아다가 급제한 사람들의 모자에 죽 꽂아 주는 것이다. 계유년 봄에 우리 둘째 형님이 과거에 오르는데 바로 탐화랑이 되어 전농시典農寺 직장에 임명되었다. 그때 문과 출신의 김자감金子鑑이 판사로 있었다. 뜰 가운데 배나무가 있어서 바람에 배가 우수수 떨어지니 김자감이 우리 형님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내가 시를 한 구 지었으니 자네가 그 짝을 지우게."
뒤이어 시를 읊었다.
뜰에 가득한 배와 밤
청지기의 기쁨이리.
滿庭梨栗廳直樂
우리 형님이 당장 댓구를 채웠다.
책상 듬뿍 저 서류는
판사님의 근심이리.
堆案文書判事憂
김자감이 발칵 화를 내며 말했다.
"그래 자네가 청지기로 나를 맞비긴단 말인가?"
우리 형님이 사과를 하고 나서야 그는 화가 좀 풀렸다.
그 뒤 전농시를 없애고 군자대창軍資大倉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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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야기를 적은 필자가 스스로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대해서 유심하게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글쓰는 자의 실력은 스스로를 어떻게 배치하고 있는가에서 드러나기도 하니까요. 무리를 해서라도 이 배치를 말해보자면, 보석 같은 이야기를 캐내어 슬그머니 드러내보여주는 실력은 있으되, 그 이야기에 거의 끼어들지 않는 배치이구나,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주말 서숙에서 열린 장독에서 "不吹毛而求小疵 털을 불 듯 남의 작은 잘못을 끄집어내지 마라."를 배웠습니다. 이 이야기를 적은 사람은 사람에 대해서 손쉽게 흠잡지 않습니다. 상찬賞讚도 없습니다. 이런 자세로 적은 이야기는 풍요롭고, 생생하게 살아 있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이 읽으며 감탄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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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3일, 오후 1시부터 저녁식사 후 헤어지기 적당한 시간까지 숙인재에서 천산족 모임이 열립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을 읽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신청마감은 9월21일(수) 오후6시이며, 신청방법은 숙인은 댓글로 신청해주시고 이전숙인은 지린에게 문자를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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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모임에서 『세월』의 영어본도 함께 읽어나가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9월 모임에서 상의해 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