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안에 갇힌 자>
어깨에서 시작된 통증이 몸 곳곳으로 퍼져 재활 차원에서 요가를 배워보기로 했다. 여러 해 전, 요가 수련으로 다른 몸을 접한 경험이 있는데 당시에 몸과의 첫 대면에서 느꼈던 난감함을 이번에도 고스란히 겪고 있다. 지금은 통증을 동반한 상태라 어쩌면 더욱 심한, 내 몸임에도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절대적인 타자임을 통감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운동이랍시고 수년간 천변이나 산에서 걷거나 계단 오르기를 지속적으로 했었다만 평소와 다른 운동을 하게 되면서 그것은 가벼운 몸짓에 불과하다는 것과 혼자만의 운동은 같은 부위의 근육만을 사용하게 된다는 한계를 알게 되었다. 걷기로 단련된 하체의 근력은 그나마 힘을 발휘한다지만 유연성은 찾아볼 수 없는 내 몸은 물기 없이 바싹 마른 통나무 같다.
요가 선생의 가르침대로 동작과 호흡을 일치시키며, 내쉬는 호흡에 통증을 몰아내려는 애씀 가운데 몸의 상태를 자가진단하게 된다. 굳은 몸에 통증까지 더해져 마음만 앞서갈 뿐 몸은 늘 뒷전이다. 뭉치고 굳은 몸을 마주하는 순간에는 슬픔이, 얽히고 설킨 몸이 이완되는 순간에는 농농(濃濃)한 쾌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몸이 기억하는 그 지점에 가 닿기를 소망하며 미세한 몸의 변화를 세밀하게 살피는 중이다.
요가를 하게 되면서 몸을 타자화하는 순간이 잦아졌다. 그것은 살과 뼈와 근육으로 구성된 몸을 넘어 굳어진 채 단단히 붙박혀 있을 버릇들까지로 나아간다. 요가 동작을 취하면서 몸의 상태를 알게 되듯이 메타적 관점에서 보게 될 때 드러나는 실력 없는 모습은 회피나 외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인정은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다음 지점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했다. 처절하게 드러나는 몸을 인정하고, 기억속의 그곳에 가 닿고자 희망할 때에 미세하게나마 이동할 수 있다. 바싹 마른 나무는 장작에 불과하지만 약간의 물기가 더해진다면 어떤 생명체의 서식지로 거듭나기도 한다. 물기가 마른 나무를 생신(生新)하게 살려내듯, 한 발을 끌고서 힘겹게 이동하는, 반걸음도 채 되지 않을 미세한 움직임은 한 존재의 정신을 그윽하게 만든다. 어느덧 통증이 사라지고 종횡무진으로 몸을 움직일 즈음, 살피던 버릇들은 어떤 모습으로 재구성 되어 있을지 그 과정을 살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