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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나라와의 교류가 금지되자, 해안가에 건설되었던 도시와 촌락들은 파괴되었고, 거주민들은 내륙으로 이주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조선의 해안에서 사람이 사는 흔적을 볼 수 없는 이유다.”(15)

 

서로 교류하지도 않고, 오히려 피하고 증오한다.”(19)

 

이 혼동의 원인은 수백 년에 걸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오랜 분쟁이다. 중국과 일본은 지속적으로 번갈아 가며 조선에 대한 주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도시와 강 이름 역시 때로는 일본식으로 때로는 중국식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47)

 

조선인은 일본인에게 미미한 저항조차 시도해보지 않았고, 천황의 군대는 마치 퍼레이드를 벌이는 것처럼 서울로 입성했다!”(63)

 

제물포는 그러한 경주로이며, 유럽인은 관객이다. 소수이긴 해도 일본인은 그래도 제법 중국인과 조선인보다 앞서 있다. 그다음이 중국인이고, 조선인은 그 뒤를 마치 짐 끄는 말처럼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조선인들은 경기에 참가하고 있지 않다.”(50)

 

 

1.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한국의 조건은 지정학적 위치이다. 유럽인의 시선에서는 세 나라 사람들은 외모로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유사성을 가지고 있지만, 유사성근접성탓에 겨누고 경쟁하는 상대가 되기도 한다. 지리적/문화적으로 근접해 있는 삼국은, 근접 국가를 상대로, 혹은 발판으로, 자기 국가의 위치를 선점하려고 싸우고 갈등해왔다. 오래된 관계이다. 교재에서는 삼국인이 조선 땅에서 맺고 있는 관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교류하지 않고, 오히려 피하고 증오한다.’ 서로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한중일 삼국 중에서 특이 우리나라는, 국가의 규모나 국력에서 오랜 시간 중국과 일본보다 열세하였다. 한국의 성취의 일면에는, 비등비등하거나 열세한 나라를 이웃으로 두지 않았다는 모방 조건의 지분도 있겠으나, 또 그런 탓에, 고조된 긴장의 전선이 조건이 되기도 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무의식적/의식적으로 중국인과 일본인을 대하는 나름의 태도, 적응/부적응의 양식을 전수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혹시, 교재에서 표현되고 있는, ‘교류없음, ‘증오’, ‘저항조차 시도해 보지 않는 조선인이 중국인과 일본인을 대하는 태도를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위협과 긴장의 전선을 살아가는 이들이 채택한 적응/부적응의 양식으로 말이다.

 

2.

한국인이 일본인을 두고 흔히 하는 평가 중의 하나가 겉과 속이 다르다,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주로 부정적인 맥락에서 발화된다. 타자를 통하여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조건을 인정한다면, 여타의 타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은 한국의 타자이고,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회이자 매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일본인을 향해 발화된 말에는 지시 대상에 대한 고유의 설명도 있겠지만 못지않게 발화자의 특성도 담겨 있다. 일본인을 향한 우리의 말을 통해서 타자를 대하는 현재의 태도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일본에 대한 강연이 있던 자리마다 반복해서 들었던 일본인에 대한 비판(이해)의 말이기도 했다. 반복된 이 말에 대한 인상은, ‘일본인이라는 타자에 대한 탐구에 진입하지 않고(못하고) ‘겉과 속의 연동성으로 일본인한국인을 구별시킨다는 것이었다. 부정적 맥락으로 쓰인 말이었으니, ‘겉과 속이 한국인처럼 연동되어 드러나지 않는 타자에 대한 불편함이 있다고도 짐작해 본다.

그것은 예측 가능성에 대한 인간 일반의 기대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이 땅의 특수성, 무력하게 침탈당한 이 땅의 역사는 예측 가능성에 대한 욕망을 좀 더 증폭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예측 가능성은 통제와 방어의 능력으로 연결되니 말이다.

 

 

3.

그래서일까? ()이 예측 가능한, 속을 드러내는 태도에 익숙하다. 쉽게 관찰 가능한 영역으로 식당이나 상점을 꼽을 수 있다. 상호 소모적인 관계 양상임에도 불구하고 이 태도를 용인하고 적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속을 드러내는 이들은, ‘속을 알 수 없는 타자처럼 불안과 공포의 대상은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장소와 상황에 맞게 응대할 수 있는 분화된 어른의 자아, 혹은 공적인 자아를 속을 알 수 없는 타자’, 그래서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었던 ’, 긴장을 조장하고 가중하였던 적과 동일시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퇴행적으로, 속을 가릴 수 없는 어린아이 같은 투명성을 어른들에게도 용인하는 것이 아닐까. 차라리 속()이 드러나는 어린아이적 안전함을 무의식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라는 거대한 타자에 대한 외상적인 경험이 한편에서 이런 식의 퇴행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 겉과 속이 아이처럼 드러나 있는 방식이 성가시고 불편하지만 차라리 예측가능하여 안전하다는 방어적인 선택의 가능성을 유추해 본다.

 

 

4.

교재에서 서술된, ‘교류없음, ‘증오’, ‘저항조차 시도해 보지 않는관계 맺음의 방식은 생산적인 태도도 적응적인 태도도 아니다. 총체적 무기력의 현실에서는 달리 이해할 수 있는 지점이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한국인의 세계, 한국인의 자의식은 그제나 이제나 타자를 통하여 확장해 간다. 그런 면에서, ‘속을 알 수 없는 일본인이라는 지금의 말이 조선인의 그것에서 얼마나 이동한 태도인가를 따져볼 일이다. , ‘예측 가능성에 대한 과도한 열망과 환상이 우리 스스로를 유아적인 투명성에 너무 오래 머물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볼 일이다.

이 나라 밖 담론들은 자신에 대하여도 알 수 없는 불가해한 타자의 흔적으로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로 나아가 있다. 예측 가능한 타자란 유아적인 환상이자 소망이다. ‘속을 알 수 없는속성은 일본인만의 특성이 아니기에, 좀 더 대상에 근접한 탐구와 섬세한 재서술을 요한다.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확장하는 그러한 탐구에 동참하고 있는가?

지금도 앞으로도 일본, 중국과의 관계는 한국의 정체성에 주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다름 아닌 스스로를 위하여, 주변국에 대한 고착된 태도와 통속적인 말(해석)을 의심하고 풀어줌으로써 전수받았으되 이동해야 할 태도를 되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 '살다, 쓰다' 게시판의 行知 (10) 연재를 이 글로 대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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