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면 망한다>
좋아하면 으레 망한다
기울면 빠진다
이쁘게 뜬 것들
절망의 아집들
주랑(柱廊)이든 쇼윈도든 아스라한 석양을 붙들고 있는
고공의 아파트에서
옥빛 하늘을 붙들고 있는
주인 없는 명기(茗器)에까지
좋아하면 으레 당한다
무명(無明)으로 잠시 빛나는 것들
k선생님, <옆방의 부처>, 글항아리
*옆방의 부처
<좋아하면 망한다>
좋아한다는 정서에 내장된 성격이나 구조가 있습니다.
좋아한다는 것과 연관하여 성애, 폭력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동물행동학이나 진화론적 맥락에서 보자면, 성과 폭력에 간여하는 뉴런이 일치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예로 왜가리는 성과 폭력을 분간하지 못하며 여기에서 좋아한다는것에 숨어 있는 폭력의 잠재성을 볼 수 있습니다.
남녀간의 사랑의 의미에서, 남과 여는 치명적인 적대관계를 맺는 존재인데 한시적인 보상으로 사랑을 가진다고 라캉은 말합니다. 이런 전제를 모르고, 좋아한다고 덤비면 낭패당하기 십상입니다.
좋아한다는 것을 도울 수 있는가로 선회해야 하는데 어떻게 서로에게 기여할 수 있을까요? 적게 기대하고, 다르게 희망하며 현명하게 선택을 해야합니다. 좋아한다에 맺히면 더 좋아하기를 바라게 되므로 좋아한다는 것을 벗어나 협업할 수 있는 관계맺기로 나아가야 합니다.
*봄날은 간다
<여자만의 충실성>
여자는 기이한 충실성을 보인다.
그 충실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아는 복종을 통해 자신을 재구성한다는 푸코의 말대로 부정적인 것이 인간의 자의식 획득에 영향을 줍니다. 여성은 복종을 통해 자신을 재구성해왔습니다. 복종아래 놓인 여성의 충실성은 오랜기간 노예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 충실성을 남성은 과연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을까요?
한 실험에 의하면 위급상황시 암컷쥐는 다른 암컷쥐를 찾아가지만 수컷쥐는 암컷쥐를 찾는다고 합니다. 여성은 본질적으로 남성의 폭력을 두려워하며 사회적 연대의 필연성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어떠한 남성이 여성에게 신뢰를 줄 수 있을까요?
*차마, 깨칠뻔 하였다
<운명을 할 수 있는 자는 그 심부름부터 해야 한다>
자기와 관련된 모든 꿈은 어긋납니다. 어긋나지 않으려면 모른체 해야 합니다. 인간정신에서 나올 수 있는 좋은 것 중 하나가 알면서 모른체 하며 열어두기 입니다.
인간정신의 비밀을 깨우치고 삶과 죽음을 구제하는 공부를 하려면 에고를 죽여야 합니다. 에고에게 막히지 않고 자기를 비우면서 발효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 밝더라도 자기일의 예측에는 밝지 않은 구조가 있습니다. 섣부르게 운명을 말하면 동티를 맞게 되며 초의식이 작동하지 못하게 됩니다. 에고가 소비한 기표나 이미지는 무의식, 초의식, 神을 폐기합니다. 에고를 죽이고, 알면서 모른 체 할 때에 허실생백이 가능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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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했기에 열리는 세상을 알면서, 인식의 밖에 자리한 세상을 모른체하는 '협지의 공부'가 섬부한 정신의 길 위에 있습니다.
기인 말들을 뒤로하고, 박두하는 '관념론의 미래(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선생님,늘봄,105쪽)'가 공부의 자장 안에 유연(悠然)히 흐름니다. 그 정신을 좇아, 그 현장 안에 머물수 있음에 오늘도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