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검(尋劍), 차방에 앉아 계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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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귀한 것은 얻기 어렵고,
그것을 얻고자 한다면 우선 다른 것을 끊지 않을 수 없으니,
수행자의 경의(敬意)란 곧 심검(尋劍)을 행하는 삶의 자세다.
(차마 깨칠 뻔하였다,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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能改能移不退轉(능개능이불퇴전)
능히 고치고 능히 옮겨서 물러서지 않는다. 돌아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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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공부가 아니’라고 한 것처럼, 자기차이화의 변덕스러운 연쇄에 불과한 생각들이 ‘안’을 채우고 있다면, 그 안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으며, 또 바로 그 이유 탓에 밖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생각에 의해 ‘사회적 결속’을 이룬 안-팎(나-남)에서 얻은 칼은 등만 있고 날이 없어 그 달콤하고 치명적인 이자관계를 벨 수가 없다. 칼은 내 것이 아니고…그러므로 네 것도 아니다. (차마 깨칠 뻔하였다, p81-82)
저는 ‘선생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벼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품으며 지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품는 것과 그것을 위한 실천은 다르다는 것을 여실히 느낍니다. 왜냐하면 선생님의 가르침은 제 생활 속에서 지며리 자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장숙에서 공부하는 중에 제 깜냥만큼의 작은 소득을 얻고 있습니다만 근래에는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라는 말씀이 더욱 무겁게 다가옵니다.
차방에 앉아 계신 선생님을 뵙습니다.
“무릇 귀한 것은 얻기 어렵고, 그것을 얻고자 한다면 우선 다른 것을 끊지 않을 수 없으니, 수행자의 경의(敬意)란 곧 심검(尋劍)을 행하는 삶의 자세다.”라는 말씀을 되새깁니다. 돌아갈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물러서지 않기 위해 能改能移不退轉(능개능이불퇴전)의 문장을 붙잡습니다. 마지막으로 제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들을 비우기 위해 오늘도 규보(蹞步)합니다. 공부길이 아득하지만 계속 걷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생각으로 일별되는 자기 에고를 낮추며 그 경계에 서기 위한 탁절한 방식으로, 타자를 듣고 말하여 생성되는 세상을 알게하는 ‘대화’를 꼽고, 키워지는 도량 담을, 보다 큰 ‘개념’과의 만남을 꼽고, 차분해진 자기속에 홀로 앉아, 茶 한 잔 들어 올릴 수 있는 허적(虚寂)의 틈이 있는 ‘생활’을 꼽아 볼 수도 있을까요.
환기되는 정신 속에 그 '반 걸음' 전위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