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라는 공부-활동
“왜 일본을 공부하세요?” 초등학교 5학년 둘째 아이가 불만스럽다는 듯 묻는다.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모르지만 면면히 작동하고 있는 콤플렉스처럼, 이 땅의 특정한 정서가 내 아이에게도 흐르고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당황했다.
‘미워하는 것’과 ‘공부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공부 아닌 감정적 반응이 돋을새김 된 내 생김새를 알아가고 있다.
이번 속속의 교재였던 『요시카와 코지로의 중국 강의』에서 저자 요시카와 코지로는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서로를 각기 어떻게 속단하고 있는가를 분석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양쪽 다 상대를 자기 편의대로 해석했습니다. 물론 각자의 동기는 달라서, 중국인은 경멸의 감정으로 인해 자기들 편한 대로 일본은 중국의 직역이라 생각했습니다. 일본인은 도리어 친애의 감정으로 자기들 편한 대로 중국은 대체로 일본과 문화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로 동기는 다릅니다만, 환영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1940년의 이 일본인은 책의 다른 대목에서 ‘학문은 사회의 이성’이라고 했고, 따라서 사회의 이성이 되는 당시 학문의 성격을 주목하고 비평한다. ‘지면 배운다’라는 말로 일본을 설명하기도 하는데, 대거 유학과 방대한 번역, '자기화'시키기까지 촘촘한 연구는 졌을 때나 이겼을 때에도 우리가 놓친 무엇이 분명하다. 시도와 노력이 없지 않았으나 우리의 연구는 어째 ‘사회의 이성’으로 통합되지 못한 채 편린(片鱗)으로 남아있는 듯하다. 아무튼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는 태도로는 타자를 만날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한다.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
나는 이번 교재를 읽으며 특별히 일본인의 ‘연구심’을 화두 삼고자 했다. 종종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연구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셨고 질문을 받을 때마다 늘 얼버무렸다. ‘연구’라는 말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대학원생이나 전문 지식인들, 특별한 학술적 재능을 가진 이들에게만 해당되는 말로 구분했고 소외시켰다. ‘지식을 지식인이 독점하는 대상이라고 용인’**하는 대륙의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 공부는 제도 학문의 것이 아닐뿐더러 내 생활을 위한 것, 내 존재에 이바지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전문 연구자와 굳이 견주어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것을, 대면해 보니 알겠다. 얼마든지 나-생활인의 영역에서도 ‘연구’라는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심오하고 깊은 주제는 당장 없어도 작지만 생생한 생활의 재료들이 있고 무엇보다 공부하는 사람의 대전제, 스스로의 정신을 믿는다면 정신의 활동을 가로막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이제 내 공부 길에도 소박한 ‘연구-활동’이 생기려나 보다.
내 자리, 내 서재에서, 예외 없이 내 딸에게도 전수된 이 땅의 태도로부터 조금 다른 길을 열어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요시카와 고지로, 『요시카와 고지로의 중국 강의』, 글항아리, 2021년, 175쪽.
**같은 책, 2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