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전통적인 종교의 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되었고 인간은 과학과 기술이 걸어놓은 최면속에서 살고 있다. 밀리미터파를 이용해 자율주행 자동차를 만들고, 전자를 가속화시켜 물질의 내부구조를 나노미터 수준으로 관찰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내는 고도의 과학 기술 시대, 일상의 장막을 걷고, 우리 삶의 곳곳에서 작동되고 있는 설비들의 과학적 원리를 들여다 본다면 그 전능함으로 무릎을 꿇고 주를 부르짖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최근 굵직한 정치경제 인사들마저도 중요한 사안을 무슨무슨 도사들에게 조언을 구해 결정한다고 하고, TV에 무당들이 떼로 몰려 나오는 것을 보면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무속이나 미신의 영향력은 큰 것으로 보인다.
선생님께서 장숙행의 어느 시점에서 ‘실가온은 인식에 대한 저항이 있노라’라는 말씀을 주셨는데 그 말씀을 곱씹는 과정에서 떠오른 소설 한 편은 김동리의 <무녀도>였다. 소설 속 주인공인 무당 모화와 ‘무지’에 대한 욕망을 품은 전근대적인 현대인인 나는 아무래도 겹치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모화는 근대 문명의 전진 속에서도 여전히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고 원한을 풀지 못하고 떠도는 이들을 해원하며 살고 있다. 그녀의 집은 수채구멍에 이끼가 끼어있고, 구렁이 한 마리가 공생할 것 같은, 질서와 규칙 이전의 카오스 세계로 묘사된다. 어느날 그녀의 집에 십여 년 동안 떨어져 살았던 아들 욱이가 장성해서 돌아온다. 그런데 모화는 욱이를 보자마자 눈에 독기를 띄며 욱이를 경계한다. 모성의 자장은 그녀를 무당에서 엄마로 되돌려 놓지만, 모화는 본능적으로 욱이의 정신이 자신이 섬기고 있는 정신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모화의 눈빛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계와 부정, 그것을 파괴시켜버리고 싶은 광기로 타오른다.
구세계가 신세계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온갖 자원을 포획하며 세력을 뻗칠 때 신석기의 시간에 머물러 있던 현지인들이 갖는 불길함의 정체는 모화가 욱이를 보았던 순간 느꼈던 그것과 일치할 것이다. 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존재로 인해, 나의 ‘소박한 전체성’(선생님)이 일시에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 이것은 나름대로의 세계를 구축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저항이다.
그러나 ‘인식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해 이전에 피지배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계층에게 정신과 문화의 고갈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모화(전통)가 아들 욱이(근대)를 죽이고 말았던 광기는 현대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모되어 흐르고 있는가. 민족주의자를 자칭하는 집단은 물론이거니와, 한국 최고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살아온 한 인간의 실체 속에 미신과 주술이 잠입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지성은 불안을 미봉하고 권세를 잡기위한 기능적인 수단일뿐, 인간의 실존과 한계를 넘는 힘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안다는 것’에 대한 설렘과 감동의 고갈, 보다 더 큰 존재의 출현 앞에서 반사적으로 독기를 품으며 끝내 자신들의 영역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원초적인 존재의 메마름.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공포와 불안을 견디며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간은 미신와 주술, 기복신앙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을 때도 있다. 숨탄 존재에게 한 마디 감정적인 위로가 엄밀한 과학적 지식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그렇기에 힘들 때 찾아가는 무당이 연약한 존재인 인간에게 비빌언덕이 되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 ‘너’에게 비빌 언덕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어쩌면 ‘너’를 견디지 않겠다. ‘너’의 전부를 부정해 버리고야 말겠다는 부정의 태도는 존재의 근원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의 말을 외국어처럼 듣고, 그 발음을 낯설게 들을 수 있을 때, 서로에게 기꺼이 넘어야 할 언덕이 되어 줄 수 있을 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어떤 말 한 마디 겨우 건넬 수 있다. '나'(전통)는 어디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