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속 중, 자득시간의 별강문입니다.
自得(1)_물화物化와 인정
공부를 추동시켜 지속 가능하게 해주는 자득의 일부 지점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그 정리된 것 중 한 가지를 간단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먼저, 공부 ‘하면서 알게 된行知’ 것을, ‘물화와 인정’의 맥락에서 말씀드려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부 하면서 저는, 이전의 제가, 제 자신, 혹은 제 삶으로부터, 저도 모르는 소외와 물화를 경험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말’이, 혹은 자기 ‘존재’가 어찌 할 수 없이 소외되고, 물화 되는 상태 속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가정을 이루기 전에는, 자본주의라는 경쟁적 성장 혹은 인정투쟁의 시스템과 상생하기 어려운 기질, 그리고, 가정을 이룬 후에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마찰하면서 생긴, 상처에 의해, 자기방어의 기제로써, 그러한 상태에 노출되었던 것 같습니다. 성향 상, 소유와 책임이 등가 되지 않는 소유가 시스템적으로 강요되고(소비), 또한, 소비 가능함이 인정의 기제로 작동하며, 그 소유를 위해 하는 경쟁으로 인해 누군가는 의도치 않게 상처 받거나, 삶을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적절히 용인하며 살지 못하였었는데요. 그 소유가 사람이든, 학벌이든, 동산이든, 부동산이든 도무지 소유·소비적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가 어찌 할 수 없다는 무력감으로, 내면 속 자기존재의 지향을 외면하며 살아갔습니다. 또, 가정을 이룬 후에의 소외와 물화는, 말의 소용이 사라진 약자의 위치에 강재로 배치되어, 정신의 존립을 위협받으며 어울려 살아야 했기에 벌어졌던 일이라고 지금은 말 할 수 있겠습니다. 부연하지 않아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안에서, 며느리라는 역할이 강요받는 ‘말’의 자리를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정리하자면, 저의 어린시절은, 경쟁과 인정시스템에의 부적응기였고, 커서 간 시집에서의 시절은, 습합되기 싫은 이상한 세계로의 댕동댕이 쳐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어떤 능동으로써 왜 자기 삶을 지켜내지 않았냐고 한다면, 체제에는 굴복하기 어려운 시선과 기질을 갖고 있으면서도, 내 삶을 엮어 낼 다른 세계를 알지 못했기에 빠진 상황이었다라고 지금은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화산업에 순응하지 않는 별종은 경제적 무능상태에 빠지게 되고 나아가 정신적 무력증을 초래한다.”는 아도르노가 한 말의 형식처럼, 자기소외와 물화의 용인은, 자기 몸이 담겨 있는 사회·문화에 순응하지 못한 별종이 겪는 일종의 자구책 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생전 만날 거라고는 짐작조차 못했던, 판타지 같은 말들의 향연 속에서, 재미있다는 흥분에 철없이 시작한 공부가, 지금 돌아보니, 공부라는 것, 그리고 공부하는 학인간의 어울림 이라는 것이, 이 물화와 소외를 해체시켜주는 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장숙은 종종, ‘말로 지어 지는 집이다’라는 표현을 선생님께 배우고, 또 직접 말 하게 되기도 하였는데요. 이 말은, ‘개념으로서 지어진 집’이라는 표면적 의미도 있겠지만, 화자, 그러니까 말하는 사람이, 자기 발화의 무게(중력)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고, 그 무게를 체감함으로, 동시에, 그 발화의 책임 혹은 그 발화의 현장에서 자기를 소외시킬 수 없게 되는 것의 실효로써 이해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것은 말하는 존재이자, 무엇보다 ‘듣기’를 소홀히 하지 않는, 선생님과 동학의 존재를 지척에서 겪게 되기에 체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말, 혹은 내 존재를 누군가 계속 듣고 알아차리고 있다라는 감각이기도 합니다.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 이상한 말과 증상일 뿐인 말 등의 성질을 떠나, 그 말을 하나의 발언으로 ‘인정·책임’받는 문화 속에서, 물화와 소외의 요소 또한 해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간혹, 내가 ‘아무도 아니다(Udeis)’라고 외쳐야만 살 수는 있는 상황에 놓이기도 하지만, 실재로 우데이스를 지속시키며 살아 갈 수는 없다는, 혹은 그렇게 살아가면 안된다는 윤리가 생성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감각은, 조심하면서 섬세하게 말 할 수 있기를 공부로써 기대하게 되고, 그 말로써, 사람 간의 관계를 보살피는 방향으로 몸을 끄-을-고 나아가는 상호인정의 관계를 알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 문화 속에서의 운신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거나, 혹은, 깊게 고민하지 않고 했던 말들의 후과를 알게 함으로, 그 말의 중력을 앎과 동시에, 내가 이곳에서 한 존재로, 말 할 수 있는 인간으로, 인정받고 있다라는 자각을 하게 합니다. 메마른 존재에서, 습기 머금은 존재로 이행되고 있다는 감각은 해원解怨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저는, ‘상호 인정하는 관계 속에서 정신이 되(헤겔)’는, 되어감의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은, 자기 소외와 물화 혹은 타자 소외와 물화의 현장에서는 피어날 수 없겠구나라는 것을 깨단하기도 하며, ‘세계와 나 사이의 임계’에서, ‘듣고 말 할 수 있’는, 혹은 ‘말하고 들을 수 있’기를 소원所願하는 ‘응하기’의 공부이자, 다른 말로 하자면, 不二의 공부, 또는 상호인정의 공부를 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제 경험과 일치하는 문장이 반가웠어요. 저도 초담처럼 듣고-응하는 존재들에 의지해서, 물화라는 망각을 뚫고, 어긋나거나 발설하고 실수하고 부대끼는 제 몸과 언어의 관계를 알아가고 있답니다.
"그러므로 '듣기'와 '(응해서)말하기'는 언제나 우리 생각보다 깊은 무엇이 될 운명을 띠고 있다." 『집중과 영혼』, 글항아리, 2017년, 3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