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의 봄
지리산 자락 아래에 있는 신라 고찰 실상사는 앞에 큰 개울이 있고 지역마을과 가까이 위치한 구산선문의 한 사찰이다.
실상사 경내에 산책하다가 문득 불교에서 말하는 실상이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불교에서의 실상은 모든 존재의 참모습이 공(空)이라고 말한다. 집착을 떠난 청정한 성품 등 종파마다 다르게 말하기도 한다.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두루뭉술하다. 도법스님은 실상이란 자기 자신에 직면하는 것, 사실 그대로 보는 것이 실상이라고 좀더 구체적이고 쉽고 평이한 말로 설명한다. 괴로움은 실상을 보지 못해서 생긴다고 한다. 자기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온갖 좋은 처방은 임시방편일 뿐이지 괴로움은 또 다시 반복될 것이다.
사람은 자기만의 본과 꼴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반응하며 인식한다. 무한대인 우주에서 먼지보다 작은 지구에 존재하는 우리의 세계 인식은 부분적이고 불완전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영원의 상(相) 아래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을 참된 이성(인식)이라고 말한다. 불교에서는 연기(緣起)적 세계관인 인드라망으로 비유하며 우주의 삼라만상을 설명한다. 온 우주를 덮을만한 넓은 그물이 있고 그물코마다 구슬이 달려있는데 구슬이 서로를 비춘다는 설명이다. 한국불교는 간화선을 위주로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을 한다. 깨달음을 얻으면 오도송을 짓기도 하는데 자기라는 경계가 허물어지고 무한하고 절대적인 자유함을 노래한다.
도법스님은 18세에 출가한 후, 깨달음을 얻기 위해 10여 년간 참선 수행에 용맹정진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다. 기라성 같은 선배인 법정스님, 성철스님에게 물어보아도 인생의 근원적인 질문이 해결되지 않는다. 이후로 실사구시적인 물음으로 자신에게 직면한 실상을 성찰하면서 이론과 실천의 간격을 좁히고자 노력한다. 스님이 자신과 세상을 바라본 존재의 실상은 생명과 평화였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원인이 되기도 하고 하나로 융합되기도 한다는 화엄사상을 바탕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노력해왔다. 생명, 평화, 연대라는 말들이 촌스런 대접을 받던 최첨단 현대사회에서 스님은 실상사 귀농학교, 대안학교, 환경운동,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그리고 범종교단체로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을 이끌고 전국으로 5년간 걸으며 생명평화 운동을 실천해왔다. 수행자이면서 고립되지 않고 대중과 함께 이 땅의 수많은 아픔과 분열과 갈등을 해결하고자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이 몽환가인 돈키호테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미친 거요? 장차 이룩할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는 내가 미친 거요? 아니면 세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는 사람이 미친 거요?” - 돈키호테
불교는 고통,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친다. 고통은 무명(어리석음)에서 시작해서 반복된다고 한다. 무명(無明)은 자기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관찰하고 알아차리지 못해 생겨난다. 언제 어디서든 자기 발밑을 살피고, 사실과 진실의 목소리에 정직하게 응하는 실천 속에서 자기의 실상을 깨닫게 된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하는 보편적인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공부 길은 가도 가도 명확하지 않고 지난할 것이지만 장숙에서는 눈 밝은 선생님과 뛰어난 동학이 함께하니 별 걱정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