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라는 詩
지윤경
좀 단순화 시켜서 말하자면 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해와 위로’의 시와 ‘실험과 낯설게 하기’ 혹은 ‘오해와 버텨읽기’의 시가 그것입니다. 전자의 예는 『시로 납치하다』 혹은 『마음챙김의 시』라는 책 제목으로 류시화가 소개하는 일련의 시입니다. 한두 번 읽고 거기다 류시화의 시 해설을 따라가노라면 시의 의미가 환-해지기도 하고 대개는 독자의 삶과 시가 포개지며 위로를 받게 됩니다. 후자는 사실 저에게도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는 시들이라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마치 칸트나 스피노자의 책처럼 여러 번 읽어도 잘 이해가 안 되거나 기껏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음에 읽으면 여전히 알 수 없는 시들입니다. 오늘도, 가만히 들여다본 시 한 편에는 시인의 마음에 가닿을 수 없는 은유의 미로가 가득했습니다. 단어들 사이로 난 미로를 헤매다 결국 해석하기를 내려놓습니다.
이런 두 가지 시 중에서 대체로는 이해와 위로의 시가 우리에게 익숙하고 편하게 다가오겠지요. 문학비평가 신형철은 시에 대한 이런 저의 분류와 비슷한 맥락의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미학적으로 진보적인 시에 손을 들어줍니다.
재현해야 할 진실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언어는 그 진실을 투명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느슨한 믿음은 미학적으로 보수적이다. 반대로 언어가 사태를 객관적으로 재현하고 진실을 투명하게 포착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의심하는 태도는 미학적으로 진보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시인의 코기토를 ‘나는 언어를 의심한다. 고로 나는 시인이다’라는 명제에서 찾는다...시는 도대체가 그것이 시이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그저 행과 연을 나눈 수필에 머물지 않고 언어를 의심하면서 겨우 한 줄씩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자해를 감당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형태 파괴, 실험, 그로테스크, 난해, 소통 불능 등등으로 규정되는 특질들이 그 자체로 이미 유죄라는 식의 언사들은 그래서 공허하다. 그것들은 그 무슨 비정상성의 징후가 아니라, 시가 최선을 다해 자기 자신을 의심할 때 나타나는 어떤 진정성의 표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언어에 대한 태만은 진실에 대한 오만을 낳고, 그 오만은 시의 언어, 언술, 형식에 대한 고민을 생략하게 만든다. 그저 독자에게 삶의 (진실에 미달하는) 지혜를 가르치려고만 한다. 그런 시들은 단번에 손쉽게 읽힐 뿐 두 번 읽히지 않는다. ‘한 번 읽기’와 ‘다시 읽기’ 사이의 시간이 사유의 시간이다. 묘사와 발견과 교훈이 편안한 문장들로 엮어진 시 앞에서 독자는 사유할 필요가 없다. 사유의 부담을 덜어주는 그런 특질들은 ‘진보적’이라기보다는 그저 ‘대중적’인 것이다. 예술에서 진보는 대중과 함께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대중을 창조하는데 있다.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17~18쪽)
‘그대’라는 타자도 ‘실험과 낯설게 하기’ 혹은 ‘오해와 버텨읽기’의 시와 같습니다. 나와 같기를 바랐던 많은 그대들.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 취향, 생활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면 좋을 줄 알았습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핸드폰과 TV를 덜 보고, 독서를 즐기고 (내가 생각하는) 좋은 친구와 사귀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이들에게 주입했습니다. 작용에 대한 당연한 반작용이었는지 어느새 아이들이 엄마의 생각이라도 들어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알려오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직장에서 만난 동료도 그러하였습니다. 학생들이 행복한 꿈을 키워가는 좋은 학교를 만들자는 희망으로 모인 동료 교사들과 함께 일했는데도 대화로 풀리지 않는 자잘한 다름들이 결국 관계를 어색하게 했습니다. 무수한 그대들이 나와 같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타자가 들어설 틈이 없었습니다. 나중에야 이러한 나의 마음이 ‘동일자의 지옥’ (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18쪽)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일자의 지옥은 에고의 이동이 불필요한 공간, 사유의 겨를이 없는 시간입니다. 자기동일성으로 충만한 게으름뱅이의 천국 같은. 이러한 에고의 거울방에서 나와 타자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주, 게으름뱅이의 천국에서 편하게 머무르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마치 한 번 읽은 후 바로 이해되는 시가 편한 것처럼.
타자는 우선 무한이다. 혹은 무한이라는 가능성으로 열린 틈이다...중요한 사실은, 자기동일성의 내재화 논리 속으로 편입될 수 없는 ‘무지의 빔(emptiness of ignornance)’이라는 사상(事象)이다. (K선생님, 『동무론』, 98쪽)
타자가 대상으로 여겨질 때 부버가 말한 ‘근원거리(Urdistanz)’는 손상된다. 부버에 따르면 근원거리는 인간의 원리로 기능하며 타자성이 성립할 수 있는 초월적 전제를 이룬다. 근원거리두기는 타자가 하나의 대상, ‘그것’으로 전락하고 사물화되는 것을 막아준다.(한병철, 『에로스의 종말』, 42쪽)
미국 시인인 아치볼드 매클리시(Archibold Macleshi)는 그의 시 “Ars Poetica”에서 “시는 의미할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한다(A poem should not mean, But be)”고 말합니다. 모든 해석은 실패한다는 K 선생님의 말씀의 한 뜻은, 나의 개입으로 시를 해석하는 우를 범하기보다 시가 거기 그저 존재함을 인정하고 시에 대해 삼감의 태도를 가지는 것과 일맥 상통하지 않을까 합니다. 해석하려 하지 않고-시와 나 사이의 거리감을, ‘그 심연을 자기 동일성의 오만으로 메워버리지 않고-‘포섭할 수 없음’과 ‘이해할 수 없음’과 ‘만날 수 없음’이라는 자연적, 존재론적 경건’(K선생님, 『동무론』, 99쪽)-의 태도로 시를 바라보고, 또 그대를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근원적 이기심 속에서 늘 잊고 있는 사실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심연을 건너가듯 조심스럽고 지속적으로 몸을 끄-을-고 나아가며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근년의 내 생각에는, 이 심연을 통과하는 일상성이 바로 ‘동정적 혜안’과 ‘극진’이라는 개념 속에 집약되어 있다. 마치 하이데거가 존재에 대한 삼감(Verhaltenheit)을 권면하는 기분으로, 나는 오히려 그 모든 타자들에 대한 ‘극진’과 충실성을 주문하는 것. (K선생님, 『동무론』, 81쪽)
해석되지 않는 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고, 에고의 거울방에서 나올 필요를 깨닫게 되기까지 무수히 아픈 에고의 깨짐과 열림이 있었습니다. 그 깨짐과 열림이 순순히 이루어진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안타깝기도 하였고, 조금 깨진 틈으로 빛이 들어오려고 할 때 완고해질대로 완고해진 단단한 에고가 마지막 저항을 하며 버티려고 한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내 경우,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가-만-히 바라보는 일보다 더한 쾌락은 없다...글(읽기)은 정화된 욕심 곧 의욕이며, 뼈에 가해지는 순결한 고통이다. 오직 지겨운 연극만이 볼만하듯이, 이해할 수 없는 글들만이 내 시간을 연극처럼 ‘의심할 수 없이’ 가득 채운다. (K선생님, 『봄날은 간다』, 133쪽)
지금 저에게는 K 선생님의 위 문장들이 타자에게 다가가는 하나의 태도로 읽힙니다. 나의 기대 안에 이해되거나 포섭되지 않는 문장(詩)-타자를 마음의 동요 없이 가-만-히 바라보는 일이 기쁨일 수 있도록 ‘동정적 혜안’으로 극진히 그대라는 詩를 보고(읽고) 오직 ‘응해서 말하며’, ‘어울리며 어긋내고 어리눅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