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
내가 존재, 그러니까 무(無)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체감한 것은, 아득한 옛날의 어느 날 밤이었다. 그날은 내가 ‘사람’이 된 날이었다. 무의 아우라가 없는 것은 아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학령기 전인 것은 확실하지만, 4살이었는지 혹은 6살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나는 내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느 곳을 걷고 있었고, 그 사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되었다. 청명한 야밤으로 별들이 많았다. 죄다 익숙한 존재물로, 바로 이 ‘존재라는 틈’의 틈입이 아니라면 아예 언급할 일이 없는 범상한 것들이었다. 나는 별(들)을 쳐다보았는데, 그 순간, 무엇인가가 내 마음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이상한 말이지만 그것은 ‘무’, 무의 가능성이었다. 나와 내 어머니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없었을 수도 있었고, 없어질 수도 있으리라는 절절하고 공포스러운 체감이었다, 존재의 틈으로 무가 번개처럼 찾아들던 순간이었다. 내가 비로소 사람이 된 날이었다. 내게 ‘영혼’이 생긴 날이었다.
김영민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
제도권 대학을 떠나 30년 가까이 인문학 공동체와 공부 모임을 이끌고 있는 철학자·시인 김영민의 책이다. ‘무가 찾아온 날, 영혼이 생긴 날’이라는 제목의 윗글에 저자는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는 『팡세』의 문장을 달았다. ‘공부의 철학자’로 유명한 저자는 수행자처럼 공부하고 실천하는 삶을 강조한다. 그에게 공부란 “매사에 진짜를 구하는 애씀” 혹은 “스스로 밝아지는 것이고, 그 덕으로 이웃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게 사는 일”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출처]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 』|작성자 어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