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사이에 심신을 조정하는 휴식기가 되면 철학자 김영민의 책에 손이 갔다. 에고가 빠져 있는 또 하나의 함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암둔했던 영역이 환하게 밝아지는 경험이 잦았다. 세속의 악다구니에서, 번란한 일상 속에서 발버둥치다가 문득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지 반성하게 될 때가 있다. 이론은, 철학자의 글은, 생활과 거리를 형성해주고 제 삶을 비평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김영민의 글은 삶을 점검할 수 있는 좋은 지침이 된다.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는 책 제목이 이미 저자의 세계관과 가치관의 알짬을 요약한다. 생활은 적어야 한다. 온갖 매체가 번뜩이는 자본주의 체제는 졸부와 속물들의 부나비 같은 생활을 정상생활로 호도한다. 그러나 정상은 증상이다. 오로지 세속과 불화하는 실존에서 새로움이 개창된다. 철학은 작아야 한다. 학인은 고담준론으로 생활과 멀어지는 대학의 '이론적 정교화'를 경계해야 한다. 개념과 지식을 제 삶 속에서 실천하는 철학에서 성인의 길을 겨우 꿈꿀 수 있다. 공부는 낮아야 한다. 중심을 높게 두면서 야밤의 맹꽁이들처럼 시끄럽게 울어젖히는 공부가 아니라 중심을 아래에 두면서 차분한 가운데 자기를 한 걸음도 아닌 반 걸음 변화시키는 낮은 공부를 실천해야 한다. 책의 절반은 이러한 전제 하에 '알고도 모른 체하기', '응하기', '동무', '비평적 생활양식' 등 그가 일구어 온 개념을 다양한 맥락에서 재확인하는 에세이로 채워져 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아무 소득 없이 밤마다 책을 펼치고 물질적 이득이 없는 글쓰기에 매달리고 있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공부를 고집하는 까닭이 스스로도 궁금했다. 저자의 책을 읽어나가면서 나중에야 교환가치에 환원되지 않는 생활양식이 '무능의 급진'이라는 개념과 얼추 겹쳐진다는 것을, '위기지학'(공자)의 공부길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공부의 요체가 자기-변화라고 알려주었다. 이 변화는 의식적인 앎이 아니라 몸의 차원, 무의식 차원에서의 변화이며, '에고'라는 완고한 습벽에서 벗어나 타자가 되는 방식이다. 이른바 성심(장자)에 붙박여 있는 편협한 마음에서 벗어나 극기복례(공자)하는 것이다. 말이 벗어남이지 '에고'가 고집하는 애착의 점착성은 강렬해서 한 두 번의 시도만으로 타자-되기가 곧장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기존의 '꼴'에서 '틀'을 얻어서 '본'이 되라고 주문한다. 생활양식을 견고한 틀에 밀어넣고 단련함으로써 자기를 서서히 변화시키는 것이다. "공부는 '제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다. 제 마음(생각)을 어떤 정해진 태도 속에 넣어 갈고 닦는 것이다."(64쪽) 이이가 『격몽요결』에서 먼저 자세를 강조했듯, 저자도 공부에서 소홀히 하기 쉬운 '태도'를 더욱 강조한다. 단련을 통해 이치를 터득하는 실존을 '자득'이라 한다. 그는 다른 책에서 이를 달인과 성인의 길로 묘사하기도 했다. "정한 사물이나 사태를 대상으로 삼아 꾸준하고 성실하게 애쓰면 실력이 생기고 솜씨가 빛나는 법이다. 그 실력의 증표를 일러 자득(自得)이라고 한다. 자득하면 길이 보인다. 그리고 희망이란, 바로 이 길을 걷는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다." (88쪽) '행지(行知)'를 강조하는 것도 지식과 실천에서 오히려 실천에 무게를 두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늘 말해오던 대로 지행(知行)이 아니라 행지(行知)이며, 지혜의 문수보살과 실천의 보현보살은 이미/언제나 일체이며, 인간의 삶이란 인간의 삶 전체를 통한 총체적인 수행(遂行)과 뗄 수 없는 상호연관성(interconnectedness)을 맺고 있는 것이다."(28~29쪽)
그런데 어째서 나는 변해야 하는 것인가? 왜 더 성숙한 존재가 되려고 하는가? 그에 대한 궁극적인 대답은 자아에 있지 않다. 결국 공부는 '타자'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공부를 해도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저자가 내세우는 사린(四隣, 사물/동물/사람/귀신)은 그가 있는 자리에 관계 맺는 모든 존재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장소화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덕이 있는 자는 그의 장소를 환하게 밝힌다. "학인이라면 체계의 공간 속에 편입되고 그 위계 속에서 승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를 가꾸며 만들어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그 세계-만들기의 기본은 '장소화'이고, 각자의 윤리적 선택에 의해 조형되는 세계는 곧 자연과 우주를 향해 열려있어야 한다."(261쪽) 항아리에 물을 담다보면 물이 넘쳐서 주변을 적시듯, 자득을 성취한 자는 흘러넘쳐서 사린에게 도움을 준다. 실력이 없는 자는 남에게 도움조차 주지 못한다. 덕도 실력이 있어야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은 제 나름의 결로 덕을 베푼 모범이다.
꼭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이념이 아니더라도 공부는 제 삶을 구제하고 이로써, 즉 그 확장된 가능성으로써 이웃에게 빛을, 도움을 주(려)는 행위인 것입니다. 구제라는 게 별스럽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론을 넘어, 제 삶과 세상 속으로 지혜롭게 개입하고 응하는 실천이 얻는 공효입니다. 그래서 공(功)이면서 부(扶)라고 할 만한 것입니다.(75쪽)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가? 그 방법론에서 저자는 다방면으로 공부길을 제시하고 있는데 요령이 만만치 않다. 이를 테면, 그는 책읽기의 실효를 인정하면서도, 책읽기에만 몰두하여 생활을 잊어버리는 학자의 과오를 경계한다. 그렇다고 직관과 돈오에만 의존하는 수행자의 삶도 온전하지는 않다. 인간에게 주어진 언어는 세계와 대상을 더 세밀하게 포착하기 위한 무기이며, 다른 생물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동뜨게 탁월한 정신진화적 산물이다. 집중과 책읽기, 직관과 언어는 겨끔내기로 함께 단련되어야 한다. 이른바 이론과 실천 사이에 변증법적인 지양이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식은 그것 자체로 아직 아무것도 아니며 오로지 제 삶을 거쳐야 겨우 지혜로 거듭나게 됨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직관과 표상은 이론의 프리즘을 통해서 보편성을 갖춘 개념이 되어야 하며, 이론은 삶의 자리로 다시 내려와 실천과 수행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그것을 저자는 '비평'이라 한다. 비평이 세계와 타인에게 향하지 않고 이미/늘 개입하고 있는 자신에게 되돌아갈 때 비로소 앎이 지혜가 된다.
지혜에 이르는 비평의 요령은 우선 그 비평이 타인을 향하기 전에 자기-비평이라는 점에 있다. 그 비평적 행위의 기원과 과정 전체에 이미 자기 자신의 개입이 엄연하다는 사실을 깨단하는 게 알짬이다. 이로부터 비평은 이론을 넘어설 수 있으며 또한 이로써 무책임한 비난으로 손쉽게 나아가지 않는다. 비평의 기원 속에 이미 자기 개입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그 비평의 실천 속에 되말아 넣은 것을 일러 '밟고-끌고(踏-蹞)'의 비평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상처로 인한 개입의 자리를 한 발로 밟고, 나머지 한 발로써 반걸음(蹞)을 내딛는 실천이다. (30쪽)
이윽고 앎과 삶이 일치하는 경지에 이르러 구원을 바랄 수 있으며, 이 때 구원은 자기 구원인 동시에 타자 구원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항시 세속과 마주치고 세속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의무와 쾌락이 다르지 않은 상태, 현명하고 복종하고 지배하는 상태, 신뢰로서 공동체를 형성한 상태가 구원의 경지일 것이다. 허나, 공부길에는 사마(邪魔)가 끼기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주체는 증상적'이기 때문에, 자기를 기만하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에, 비평과 지혜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자기 정당성을 구하는 에고의 실행은 이미 원천적으로 자기관찰을 포섭해서 왜곡시킨다. 증상적 방어기제로써 겹겹이 호위된 에고의 원환(圓環)에 그 아상(我相)은 회절, 혹은 훼절(毁折)될 수밖에 없다."(198쪽) 억압된 것에 의해서 주체는 저마다 맹점을 가지며, 그 자리에 에고를 정당화하는 환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자리하게 된다. "자기관찰의 불가능성 속에서 일희일비하고, 그 관찰의 맹점에 넘어져 증상적으로 살아가는 게, 이른바 '정상 생활'이다. 정상은 곧 증상인 셈이다. "(198~199쪽) 공부하지 않는 인간이 편협해지는 까닭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인식론적 함몰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일본놈들은 무조건 나빠.', '여자가 뭘 하겠어?'와 같은 말을 서슴 없이 뱉는 자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에 지펴 있으며, 이들은 타인에게 언제나 해악을 끼친다. 공부는 무의식을, 인식적 맹점을, 이데올로기와 환상을, 새로운 생활 양식으로 부단히 변화시키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제 마음에만 머물러서는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진심(眞心)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제 마음을 중심으로 발견되는 게 아니라, 마음의 안팎이 어울리면서 '연극적으로' (재)구성되는 수밖에 없다." (213쪽)
이렇게 공부하는 인간은 세속과 창의적으로 불화하는 생활양식을 조형하는데, 이미 우리가 사는 세속은 졸부와 속물이 지배하고 있으며, 온갖 매체가 졸부와 속물의 발호를 매개하고 있어서 쉽지 않은 싸움을 예고한다. 한국의 급속한 경제적 발전은 식민지적 근대화와 전쟁의 굴곡을 거쳐서 졸부를 양산했다. 존재의 실력은 오랜 시간의 단련을 통해서 서서히 증명되는 법인데, 졸부는 급속한 부의 팽창에 걸맞는 실력을 갖출 시간이 없었다. 과시와 허영이 그들의 생활양식으로 자리잡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존재양식(Seinsweise)의 함양(涵養)은 장구한 정신역사적 과정이므로, 졸속하게 얻은 재산이나 지식은 존재론적 정당화에 실패함으로써 필연적으로 꼴사나운 과시나 허영의 습벽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간단히 이를 '속물'이라고 부름직한데, 대개 속물은 곧 상징적 자기 정당화에 실패한 졸부이기 때문이다."(232쪽) 속물은 졸부에 파생되어 등장한다. "너,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를 남발하는 자다. "졸부가 곧 속물로 이어지는 이유는 간단히 말해 '내적 공허함' 탓이다. 『소학(小學)』이 말하듯, 중심(中心)과 안색(顔色)은 서로 융통할 수밖에 없지만, 졸부란 말하자면 제 안색조차 건사할 수 있는 중심이 없는 것이다."(271쪽) 그는 자신의 소속과 실력이 분열되어 있는 존재다. 과거의 귀족 사회는 그들이 기득권일망정 나름대로 축적해 온 정신문화와 실력이 있었다. 졸부와 속물의 사회에서는 전통으로 대변되는 실력이 없이 파리떼처럼, 깊이 없는 자기 실존을 드러내어 보인다. 학인들이 속물적 체제에 편입되면 대중에게 영합하고 매체에 빌붙는 건달이 되거나 이론적 정교화에만 매달리고 타인에게 실효가 없는 헛똑똑이가 되는 것이다.
체제의 고인물에 익사하는 실존이 되지 않으려면 계속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시작은 역사적 사건이기 전에 인간의 최고능력이다."(114쪽, 한나 아렌트) 신에게도 동물에게도 '시작'은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스스로 약속하고 결단하고 행동을 개시한다. 저자가 '동사적 실존'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며, 사랑이든 자유든 그것은 내용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수행적으로만 실현된다. 공부가 그러한 것이다. '그래도 다시 한 번!'(니체)의 정신이 좌절과 불행을 딛고 달인과 성인을 향한 한 걸음을 걷게 한다. "현재를 살아내는 일은 '지금 이것을 (다시) 시작(今是猶始)'하는 일이기도 하다. 시간은 우주 속에서 빛의 도움을 얻어 늘 영원한 현재이므로, 오직 현재 속에서 영원히 시작하는 것이다."(135쪽) 그러다 보면 어느새 다른 존재가, '더 큰 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 많고 좋은 지식이 잘 쟁여지고 시간을 얻어 발효하게 되면 반드시 그 정신은 터지고, 트인다."(137쪽) 무엇보다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실존을 희망해 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