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말하기 위한 노력들
연니자
말을 잘 하기 위한 노력은 저의 경우, 중학교 1학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어리석고 늦되기까지 한 저는, 사람들의 마음이 다 같고, 또 제가 느끼고(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도 느낄 것(알고 있다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고, 일요일마다 가족회의를 하는 무척 질서가 있는 집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그 점,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인, 우리 집과 다른 지적인 분위기가 있는 친구네 집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 마음과 달리, 그 친구는 제가 자신의 아버지를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무시하는 듯한 말을 했다고 하며, 이를 묵과하지 않겠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저는 두 가지 점에서 몹시 충격을 받았는데, 어떻게 내가 하지도 않은 생각과 마음을 내 말 속에서 느낄 수 있는지와 ‘묵과’라는 낱말 때문이었습니다. 친구가 느낀 제 말은 제 심리적 진실에 비교하면 터무니없게도 정반대 쪽에 있는 말이라서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조차 몰랐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편지는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저에게는 너무나 낯선, 언어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순진하기 조차했던 저는 수습하려고 하면 할수록 수습이 되지 않는 난감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해를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은 오해를 낳았고, 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으로 제가 타자와 새로운 언어를 만난 순간이었습니다. 친구가 나와 다르다는 것, 말로서 내 마음(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어렵고, 세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또 내 마음도 내가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것, 등 내 것이 아닌, 내 것일 수 없는, 이미 나를 벗어난 말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제 언어의 부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시작된 습관은 복기(復棋)입니다. 복기(復棋)는 바둑에서, 한 번 두고 난 바둑의 판국을 비평하기 위하여 두었던 대로 다시 처음부터 놓아 보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바둑 한 판을 마치고 난 기사처럼, 매일 밤 자기 전에 그날의 주요한 대화를 복기하였습니다. 흰 돌과 검은 돌을 차례차례 놓듯, 상대방의 말과 제 말을 차례차례 놓고, 적절하게 말하였는지, 적절하게 말하지 못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다시 돌아가 말할 수 있다면, 어떻게 말을 할 것인지, 차근차근 살펴본 이후에야 잠에 들었습니다. 그렇게 오래 복기를 해오면서, 저는 제 말에 얹힌 심리와 정서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대화의 맥락과 다른 말을 하게 되는 상황, 불필요하게 방어적인 말을 하는 경우, 불쑥 내뱉어진 말 등, 말에 드러난 저의 정서를 살피게 되었고, 그 말들과, 말에 맺힌 심리(정서)를 탐색하면서 제 자신에 대해 탐색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 말을 통해, 자신을 알아갔습니다. 때론 어떤 말에 드러난, 여전히 맺혀 있는 제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다독이기도 하고, 섣부른 말로 혹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닌지, 염려하기도 하였습니다. 복기를 하고 난 후, 너무 마음에 걸리는 말들은 상대에게 전화나 문자를 하여 사과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어떤 말은 삼키고, 어떤 말은 내뱉어야 하는지, 조금씩 정돈해 나갔습니다.
두 번째 주목했던 것은 제 생각(마음)을 잘 전달하는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너무너무 하고 싶었던 말이나, 꼭 해야 할 말은 그 말의 심리적 무게와 절박함 때문에, 막상 대화의 현장에서 차분하게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복기를 하면서, 제가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에 주목하고, 그 날은 비록 잘 말하지 못했더라도, 다음에 같은 주제로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 생각을 정돈하고 말을 준비해나갔습니다. 그렇게 잘 준비가 되면, 편한 친구에게, 동생에게, 슬쩍 준비된 말을 연습하기도 하였습니다. 말을 다듬으면서 제가 했던 노력 중 하나는 말에서 가급적이면 지시대명사나 대명사를 덜 사용하려 했고, 약간 반복적으로 들리더라도 주어나 목적어를 생략하지 않으려 했으며, 주술관계를 살펴, 어긋나지 않도록 말하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을 잘 하기 위한 저의 노력은 잘 듣는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은 애써 배워야 하는 것이므로, 에고라는 자기동일성에 갇혀 있으면 타자를 만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말을 하려 하기보다, 먼저 말을 듣고, 타자의 심정을 이해하기보다, 타자가 처한 상황을 이해함으로써 타자의 말에 다가가려 합니다. “인간의 가능성과 삶의 진경은 제 생각, 제 관심, 제 변덕, 제 호의가 아니라 생활양식의 새로운 틀거리 속에서 현명한 어울림과 응함(和應之智)을 가능케 하는 약속과 지계 그리고 현복지를 통해 밀밀면면(密密綿綿)하게 드러나게 될 것”1)이라는 선생님의 글귀를 새깁니다. 이미 그 대화의 현장에 내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깨단하고, 짐작하기보다 ‘모른다’는 자리에 서서 배워가려고 합니다. 듣기의 형식을 드러낼 수 있는 말을 애써 사용함으로써 내용만이 아닌 형식으로 말을 하고자 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정리해서 되묻기도 하고 적절한 인사를 통해 예의를 지켜나갑니다. 비록 작은 말일지라도, 그 말을 통해 제가 드러남을 알고, 잘못 말해진 말을 통해 제 자신을 살피고, 형식과 예의를 갖춘 말을 통해 상대를 공대하려 합니다. 말 속에 드러난 제 인간관을 늘 점검하고, 질책하고, 참회(懺悔)합니다. 제대로 응할 수 있는 현명한 실천-응접, 냅뜰성, 환대, 대화, 복종, 근기, 고독, 모심, 치유 등등-을 통해 깨닫고 닦는 공부를 하고자 합니다. 오직 알뜰하고 자잘한 유심(留心)들의 온축을 통해 무심(無心)2)에 이르고자 합니다. ‘사람의 일이란 관념과 달리 단박에 이루어지는 게 없(理雖頓悟事非頓除)’으므로 길래 나아가고자 합니다. 어리석고 부족한 제가 조금 나아지고자 해왔던 실천들을 부끄럽지만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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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중과영혼」글항아리, 2017. p915.
2) 「집중과영혼」글항아리, 2017. p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