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강산>
맨 얼굴로도 분광하는
꿈의 시대, 줌(zoom)의 시대
좀팽이들의 시대
가면의 힘으로 일껏 솟아오른 진실의 한 조각은
기생꽃 주름처럼
저녁이면 다시 풀린다
풀 먹인 거짓이 등록될 때마다
첨단 손거울 속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오천만의 부나비들
한목소리로 인감(印鑑)을 찍는다
맨살에서조차 거짓의 타투를 지울 수 없어
변명의 더께 위에서만
한 푼의 진실을 삼투압처럼 허용하는
오늘도
우리들의 금수강산
k선생님,<옆방의 부처>,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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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는 모임에서 구성원들이 살펴야 할 세가지 갈래가 있습니다. 집을 짓고 있는지 아니면 허물고 있는지, 신뢰의 형성 여부 그리고 각자의 자득(自得)을 살펴야 합니다.
호감과 호의 너머에 있는 신뢰는 '나는 너를 도울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통해서만 성립합니다. 공부는 제 삶을 구제하고 그 확장된 가능성으로써 이웃에게 빛을, 도움을 주려는 행위인 것입니다. 호의와 호감은 금방 사라지지만 신뢰는 내용이 없어 애매하긴 해도 한번 형성되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신뢰할만한 사람을 구하기 보다 스스로가 신뢰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한 사물이나 사태를 대상으로 삼아 꾸준하고 성실하게 애쓰면 실력이 생기고 솜씨가 빛나는 법입니다. 그 실력의 증표를 자득(自得)이라고 합니다. 자득을 하면 길이 보이고 정신이 커지며 남에게도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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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념이나 욕심이 에고의 첨병을 이룹니다, 에고의 하위단위인 생각과 싸우는 것이 공부입니다. 과잉속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기보다 실존을 염려하고 삶과 죽음 이후를 염려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있는 것은 대화가 흐릿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대화가 쓸모없는 사이비 문제나 생산성없는 논의로 수많은 낭비를 하고 있습니다. 말만 투명해져도 많은 수모나 혼란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마음은 언어적인 것으로 명료하고 좋은 개념을 지닐 때에 깊고 먼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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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선생의 말을 따르고, 자신을 죽이려 한 형과 형수를 수용한 밀라레빠는 당대에 부처가 된 인물입니다. 리비도 결착관계에서는 공부의 효험을 보기가 어려운데, 이러한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을 매개로 삼아 공부를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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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몸에 얹혀 있습니다. 문명도 정신도 공부도 마찬가지 입니다. 도가에서는 ' 배(腹)를 알면 도가 멀지 않다'고 말하며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feeling이 의식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느끼고 아는 존재>에서 서술합니다. 몸에서 말이 나오는 경험을 하게 되면 몸을 중요한 토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옆방의 부처 <금수강산>
공부는 타자를 매개로 하여 어떤 것을 실천해보는 것인데,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자신을 잘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타국에 가 보지 않으면 제 나라의 위상을 알지 못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담헌 홍대용은 금강산을 보고 실망하여 금강산을 찬미한 글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연암 박지원은 드넓은 만주벌판을 보고서야 인간의 정신이 바뀌는 글을 남겼습니다.
吾今日始知人生本無倚附(오금일시지인생본무의부)
只得頂天路地而行矣(지득정천로지이행의)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사람이란 본디
어디고 붙어 의지하는데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걸어갈 뿐임을 알았다.
많은 경우 매사에 애국주의, 국뽕에 취해 있는데 이러한 집단적 정서야말로 공부하는 학인에게는 암적인 증세입니다.
애국심이 아니라 애국주의는 에고의 연장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이른바 증세적 자아구성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의 위상을 살피며 타인을 향해 몸을 끄-을-고 나아가는 것이 공부입니다. 말투, 버릇 세계관을 비롯하여 자신의 위상을 파악하는 것이 학인으로서의 첫걸음입니다.
*봄날은 간다 <성직자라는 신호>
僧不敬佛 俗卽敬佛(승불경불 속즉경불)
중은 부처를 경배하지 않고 오히려 속인들이 부처를 섬긴다.
믿음의 주체는 고위 성직자보다 오히려 일반 신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민중이 종교를 믿는 것은 의미를 찾는 것인데 가끔은 응답해 주기를 바라는 실효를 요구합니다. 실효를 합리적으로 제공할 능력이 없는 성직자는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최전선에서 수행에 회의감을 갖게 되며 자기소외나 어긋남을 경험합니다.
자신은 모르는데 누군가 안다고하면 그것에 쏠리는 현상이 생깁니다. 즉 안다고 가정하는 주체가 생기면, 특히나 비평이 없는 종교는 전이에 빠지게 됩니다.
인간의 일에 대한 연구방식은 자료를 수집하여 패턴을 발견해야 합니다. 미래일은 모르게 되어 있으며 원칙상 사람은 미래를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화, 꿈, 점과 같은 것은 애매한 텍스트인데, 애매할수록 '모른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제도종교의 성직자 또한 '모른다'고 말하면서 신도와 함께 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천당'을 안다고 말해야 하는 불행에 처해있습니다.
컵이 컵임을 알면 믿지 않습니다. 알면 믿음이 불필요해집니다. 모든 믿음의 태동은 '모른다'입니다. 우리 공부는 대학과 종교가 하지 않는 공부를 하면서 '알면서 모른 체 하기'로 인문학의 지평을 넓혀보고자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