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관하여 별강자 영도
이 세계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이 세계를 위한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가장 웅장하면서도 간결한 말은, 복음서가 ‘기쁜 소식’을 천명한 몇 마디 말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 인간의 조건(한나 아렌트)
1. 어느 때처럼 속속 수업을 마치고 몇몇 숙인은 차담을 나눈 후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A에게 전화가 온다. 도로에 로드킬 당한 고라니가 있는데 차를 세워놓고 혼자서 용쓰다가 무서워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한 전화였다. 숙인재에 다시 돌아와서 함께 삽과 장갑을 챙기고 현장에 다시 갔다. 나는 처음 동물 사체를 치우게 돼서 약간의 들뜬 영웅심과 안개가 자욱한 을씨년스러운 차가운 밤기운에 무섭기도 하였다. 현장에 도착해서 본 고라니는 내장이 다 드러나고 역한 냄새도 났다. 사체는 죽은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우리는 도로 한가운데 죽어있는 사체를 종이 박스에 감싸서 묻어둘만한 곳을 찾아서 이동하였다. 나는 후레쉬를 비추고 A는 열심히 단단한 땅을 판다. 처음 쉽게 생각한 바와는 다르게 시간이 걸리자 비위가 약한 나는 살짝 어지러웠다. A는 건축가답게 야무지게 정성들여 고라니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이날 이후로 나는 장숙 공부와 숙인들에게 묘한 신뢰가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2. 서울에 머물게 되면서 오랫동안 서울 은평구에 지내시던 이모 집에 몇 번 왕래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혼자 사는 것이 안쓰러운지 이모는 저녁 먹으러 오라고 전화를 주셨다. 저녁밥을 한상 크게 차려주시고 파김치, 깻잎반찬 등 밑반찬과 살림에 보태라고 여러 가지 한짐 챙겨주신다. 들고 가기 힘들 것 같아 걱정이 되었는지 아흔이 다되신 이모부께서 자가용으로 손수 태워다 주셨다. 이모부는 개인택시를 오랫동안 하셨다. 자가용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모부의 인생을 조금 알게 되었다. 이모부는 이북 출신인데 6.25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국군의 손에 이끌러 열 살 남짓에 남쪽으로 오게 되었다. 보육원에서 지내면서 집집마다 밥을 구걸하는데 늘 먼지 나도록 맞고 나서야 밥을 겨우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결혼을 하였지만 너무도 가난했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한 택시회사에 취업하면서 회사 건물 지하에 있는 단칸방에서 15년을 살았다고 한다. 무사고 택시운전으로 나라에서 개인택시를 무상으로 지원받게 되었다. 어느 정도 생활의 기반이 갖춰지자 다시 함께 살 여성을 찾고 있었다. 중매를 보게 되었는데 아이가 셋이 딸린 여성을 만나게 되었고 이모부는 아이가 셋이니 자기를 버리지 않겠구나하고 안심이 되어서 이모와 결혼을 하셨다. 이모부는 밤낮으로 택시 일을 하고 이모는 거친 공사판에서 페인트칠을 하면서 아이 셋을 잘 키워내셨다. 얼마 전에 학창 시절에 무던히도 속을 썩였던 막내아들이 이모부에게 점심 식사를 사드리면서 고급 외제차인 벤츠를 선물로 드렸다고 한다. 아흔이 되어가는 이모부에게 차가 그리 필요치는 않았다. 옛날 생각이 났는지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고 한다. 소리내어 울려고 해도 울음소리는 가슴 안에서만 맴돌았다. 이모부는 강호동처럼 몸집이 크다. 그렇지만 말씀을 하실 때는 여성스럽고 부드럽게 존댓말을 하신다. 평생 60년 가까이 택시운전을 하시면서 온갖 손님을 만났지만, 밥벌이를 천명(天命)처럼 여기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