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빛에 의지하여 공부하는, 처음 열리는 (외) 속속의 자리, 숙인재 도착 후 서둘러 청소를 끝내고 한결 차분해진 차방에 모두 둘러 앉아 『차마, 깨칠 뻔하였다』를 돌아가며 낭독하였습니다. 조금만 딴 생각하면 글자와의 빈틈없는 관계가 일시에 무너지고야 마는, 무사의 결투같은, 하여 변명이 틈입할 여지가 없는, 낭독 안에서, 한 문장을 발화하는 나의 말에 이어, 죽비처럼 훅 내리치듯 이어지는 동학들의 다음 문장으로, 서로의 에고를 잠시 내려놓고 K 선생님의 문장들을 ‘차마, 깨칠 뻔’하였습니다.
변명을 하지 않는 자는 낭독을 한다. (‘낭독’이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낭독적 형식의 삶’일 것이다.) 변명의 고질인 변덕과 자기중심성(egocentrism)에서 벗어나려는 자는 낭독을 선택한다. 이런 뜻에서 낭독의 본령은 에고를 넘어서는 일이며, ‘공부’의 취지를 압축한다. 낭독은 입 밖으로 소리를 내보냄으로써 그 자리에서, 그 순간에 자신의 운명을 단발로 마무리하는 행위다. 입을 벌리지 않을 수도 없고 입을 고쳐 벌릴 수도 없다. 오직 애초에 정한 대로 발성해야 한다. ‘정(定)한 대로’일 뿐이다. 정한 대로 하는 게 낭독이다. 애초에 정한 구속에 집중하고 그 구속에 따라가는 행위가 낭독이다. 애초에 정한 모든 약속을 음성 하나에 온전히 기입해야 하는, 점점이 계속되는 숙명이 낭독이다. 물론 인생은 정한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책에서 인생살이의 본질을 ‘어긋남’으로 정식화하기도 했듯이, 사람들의 세속은 정한 대로 되지 않으며 사람의 마음은 늘 변덕을 부린다. 역설적이게도 낭독의 비밀은 거기에 있다. 어긋남의 세속을 살아가는 어떤 한 인간이 변덕의 광장에서 벗어나 외줄타기 형식으로 이루어진 발성에 집중하면서, 그 집중 속에서 스스로 구속되고, 그 구속의 좁은 문에서 열릴 자유의 ‘빈자리’를 예감할 수 있다면, 그는 변명을 넘어 아득히 나아간 것이며, 자신도 모른 채 영혼이 움틀 수 있도록 애쓴 것이다. 변명하는 삶을 탈피하고자 한다면 낭독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 삶의 핵심은 에고의 번란한 ‘생각’을 아득히 넘어서는 집중의 차분한 지속이다.
『집중과 영혼』, 574-575쪽
그동안 차담을 주로 나누었던 차방이 낭독의 장소, 적경의 장소, 평인의 장소로, 바뀌어가며, 그 장소에서의 어울림이 장소의 색조와 농도를 짙게 하는, 극진함으로 촘촘히 엮인, 한 고대의 시공간 속에 머물렀습니다.
* 동학들에게 한 가지 부탁드립니다.
이번 교재 후기는 베버의 이 한 문장(단락)!으로, 베버를 읽으며 가장 밑줄 치고 싶었던 부분을 댓글로 올려 주었으면 합니다. 얽힌 실타래 같은 세계 종교를,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정치를, 엄밀한 분석틀로 설명해 나가면서도 어느 부분에서인가는 시인으로 화하는 베버의 서술을 같이 나누며 오래도록 기억해 보려 합니다.
삶이 가진 가장 격렬한 체험방식들, 즉 예술적 그리고 에로틱한 체험 방식에 대한 어떠한 자연스러운 헌신도 거부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서는 부정적 태도에 지나지 않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합리적 체험방식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적 태도가 윤리적 차원 및 동시에 순수한 지적 차원에서 인간의 정신적 기력(氣力)이 합리적인 활동이라는 궤도로 더욱더 많이 흘러 들어가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탈주술화' 과정과 근대> 262-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