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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不移)
바보들의 혀는 주저함이 없는 기하학
당기지 않고도 날아가는 제 생각의 살(矢)
힘-껏
외치는 대로
독단은 지혜가 되고
목이 쉬도록 눈알이 붉어지면
원망(怨望)은 불현듯 진리의 이명(耳鳴)이 된다
확신은 제 악취에 취한 채
자아의 소굴에서 오월의 벌꿀처럼 흘러나온다
말 없는 개미들의 시체가
역사의 연금술을 증명할 때까지
산죽(山竹)처럼 붙박은 그 자리
바뀌지 않는다
<선생님 책, 옆방의 부처, 23쪽>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지식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말버릇 정도를 고치지 못하는 특정인을 선생님께서 예로 드셨는데 자신이 가진 맹점으로 인해 제 버릇을 고치기가 어려운 것은 너나 할것없이 겪는 문제인 듯 합니다. 그러하니 공부라는 것은 이동할 수 있는 것 즉, 자기를 고쳐가는 것(改)이지요. 내용중심의 교육이 나름대로 기여한 바가 있긴 하지만 그것은 선발만 목표로 할 뿐 공부의 방향성이나 무엇을 희망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선발의 대열에 들어선 고교생들에게 형식의 공부를 거론할 여지조차 없다는,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한 회원의 발언은 내용중심으로 편중된 우리 사회의 실태를 말해주는 듯합니다. 자기를 바꾸어 가는 공부는 내용이 아닌 '생활 속의 중요성 (Lebenswichtigkeit)'에 주안점을 두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즉, 일상의 결이 달라지고 생활에 이바지할 수 있는 형식의 공부는 자기 삶을 구제하며 나아가 이웃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는 칼과 같아서 원망을 끊어 낸다'(智慧若刀 斷除寃結) 는 말에서 보듯, 원망이 만연한 우리 사회, 그리고 각 개인에게도 더욱 절실한 것은 내용이 아닌 바로 형식의 공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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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해서 말하기
''응하기는 타자와의 사이에서 상충되는 경계를 넘어서는 것, 즉 타자성의 훈련''입니다. ''예수나 부처에게 기층민중이 따랐던 것은 특정한 도그마의 설정이 아니라 솜씨와 지혜, 관후함으로 잘 응했기에 그러했을" 거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물이 오면 잘 응하고 사건이 생기면 잘 분별한다'( 物來而應 事起而辨 )는 말처럼 성인은 응하기를 잘 한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선생이 된다는 것은 늘 불가능과 마주서는 노릇' (선생님 블로그 글 참고)이기에 아는것을 가지고 베푸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의 일종으로, 서로 관계를 맺고 응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지식이 높아지면서 남을 괴롭히는 경우도 있고 자기 변통을 보이게 마련이니 응하려는 마음이 과도해서는 안되며 남을 애써 돕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응하기의 팁을 소개하자면 첫째, 자신의 몸을 통과한 것을 말해야 하는데, 말은 복잡한 층이나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을 통해 배우게 되는 대개의 공부도 선생님의 몸을 통과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수월하게 모방을 할 수 있고 더불어 자득을 챙기게 되는 것이 많은 듯합니다. 둘째, 먼저 말하지 않고 아는 것을 다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직관적 교감으로 공유 가능한 정신적 지점이 있기도 하고 말이 가진 난점으로 인해 말로 하기가 어려운 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오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오해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에 오해를 피할 수 없으며, 서로의 정신이 자라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니 오해를 삼키고 넘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응하기가 전부라고 할 정도로 잘 응한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 아닐 수 없는 듯 합니다. ''방 안에서만 퉁소를 불거나 여포의 창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임상의 현장에서 잘 응하면서 타자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선생님께서 하신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며 선 자리를 다시금 살펴봅니다.
※위 글은 장독시간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