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과 핑계없는 삶
속속공부를 시작한 후 나를 제일 많이 돌아보게 하는 화두는 변명과 핑계였습니다.
평소 변명과 핑계를 잘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공부자리에서 이 말을 접하고 나니 시시때때로 제게서 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건 자주 마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진술되었고, 타자성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드러났습니다. 나의 진실이 ‘그(그녀)’ 속에 있는 것을 모르고 하는 타인에 대한 말은 곧바로 나에 대한 변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속속 공부가 조금씩 힘들어질 때 동학들에게 공부가 힘들다고 말하는 ‘고백’은 결국 삶의 재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한 저의 변명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공부를 위한 삶의 재배치는 우선 ‘정한대로 하는 것’입니다. 어렵다, 힘들다는 마음을 버리고 해야 하는 것들을 하다 보니 산새일과 집안일이 핑계가 되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해명이 변명이 되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건 오해받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산새에서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오해하는 일들이 종종 생기기 마련입니다. 어떤 해명은 변명이 되었지만, 오해-받기의 작은 실천으로 그냥 두었던 것들 중 자연스레 풀린 것도 있었고, 그런 오해들이 제 깜냥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산새에서 주로 말하는 자리에 있는 저는 말이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그것을 다시 변명해야 하는 일들도 생깁니다. 주로 사소한 것들이지만, 반복이 되면서 저를 지치고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변명들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응해서 말하기’의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고 끝까지 듣는 것, 말을 줄이는 것, 할 말이 없을 땐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오해도 줄이고 산새에 오는 이들의 말을 살리는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는 중입니다.
‘변명과 핑계없는 삶’ 이라는 명제는 또 다른 명제들을 불러왔습니다. k님의 명제들은 하나가 모두를 돕고 모두가 하나를 돕는 형식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k님의 책들도 한권에 여러 권이 있는 듯하고 여러 권이 결국은 한권 같다는 것과 닮아 있습니다. 앎이 곧바로 행이 되지는 않기에 행하면서 알아가는 삶이 되고자 합니다.
k님의 <집중과 영혼>중에서 관련된 부분으로 마무리 합니다.
"변명을 내밷은 것의 아주 저편에 있는 게 오해를 삼키는 일이다. 영혼은 언제나 모호한 용어이고 '오해'는 인간사에 얽혀 더욱 복잡해진 말이지만, 오해에 쫒겨 까탈스럽게 도망다니는 노릇은 영혼을 속으로부터 갉아먹는다. 만약 오해를 피한 답시고 변명에 나선다면 이는 최악의 선택이며, 죽도 밥도 안되는 하책이다. 물론 앞뒤 재지 않고, 오해를 품고 삼키는 행위를 특권화하려는 게 아니다. 스스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이유는 없다. 품어야 할 오해가 있는 반면 풀어야 할 오해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명이 슬그머니 변명이 되는 자리를 매섭게 살펴서 운신해야 한다. 영혼에 관한 한, 해명은 별 득이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변명은 명백한 해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