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31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나라는 여백(餘白) 1
-J의 訃告

 


“이 영화(파이란) 속에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어눌한 부재 속에서 피어오른다. (…) 당신이, ‘이런식으로’ 사_랑_이_있_다, 고 주장한다면, 나 역시 내 요란한 철학을 잠시 접어두고라도 기꺼이 묵수하리라.”( k님, 사랑 그 환상의 물매)


 
시란(是鸞). ‘귀한 소식을 알리는 기별(방울소리)’이라는 뜻을 지닌 새 이름을 얻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이름을 준 H에게 세 사람의 부고(訃告)를 전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내 첫 직장 상사 J였습니다. J는 간밤 들이닥친 화마(火魔)에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말았는데, 그 비극은 ‘폭염 속 에어컨 발화’라는 시사성 탓에 ‘OO동 아파트 화재…50대 여성 사망’라는 제목의 뉴스로 활자화되어야 했습니다.
 

J는 주2회 발행되는 의학전문지의 편집국장이었습니다. 위로 스무 살 넘게 차이가 지는 애인을 둔 독신녀 J는 잘 웃지 않았고 늘 회색 슈트 차림이었으며, 미숙한 신입의 출근복장을 지적할 때에나 한 달에 한두 번 꼭 지각을 하고 마는 신입에게 눈길을 흘릴 때에도 늘 한결같이 무심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딱 한번 신입이 쓴 기사에 대해 칭찬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그는 여전히 무심-하였습니다. 신입은 이후 2년을 못 채우고 더 나은 조건의 직장을 구해 그곳을 떠났고, J는 퇴락해가는 타블로이드 신문사에 남아 20여 년간 데스크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사실 H와 J는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입니다. 나름의 인물평을 궁리하며 한두 번 H와의 대화 자리에 J를 호출한 것이 전부인데, J의 용모는 어딘지 박근혜 씨를 떠올리게 했고, 그 둘이 모이니 어느새 소설가 서영은 씨까지 곁붙어 나는 이 세 사람의 닮음(다름)에서 어떤 비밀을 염출해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마다의 벡터는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어떤 일관성을 얼굴에, 몸에 새기고 있었습니다. 각별한 인정을 나눈 사이도 아니었고, 특별히 호감을 가질 만한 구석을 지닌 것도 아니었던 J. 그곳을 떠나온 후 나는 J와 단 한 번 우연히도 마주친 적이 없었지만, J는 그렇게 이따금 내 말이 있는 자리에 다녀가곤 했습니다.


부고를 전해 듣던 날. J 역시 그곳(안정된 직장이 아니었던!)을 거쳐 간 수많은 신입 중에 하나였을 나를 기억하고 있었고, 몇 달 전 그가 나의 안부를 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함께한 기간은 길지 않지만 업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어서 뿌듯하다. 풋풋한 모습만 어렴풋한데 언제 한번 만나고 싶다”는 늦은 전언이었습니다.


노회찬 씨와 소설가 최인훈 씨 두 분을 위해 초를 켜고 애도하겠다던 H는 잊었다는 듯 한마디 덧붙입니다. “시란! 쑥고개 성당에 가서 세 개의 초를 켜겠어. J를 위한 초도 하나 더!” 나는 여전히 내 말의 자리에서 J와 재회합니다. 그리고 J와 나 사이에는 언제나 H가, 매개로서, 그저 있습니다.



  1. 여성

    Date2019.03.13 By형선 Views276
    Read More
  2. Hirt der Sprache

    Date2019.02.27 By형선 Views330
    Read More
  3. ‘대책 없이 추워진 날씨에 고양이 걱정’

    Date2019.02.13 By형선 Views341
    Read More
  4. 살며, 배우며, 쓰다(정신의 형식)

    Date2019.02.02 By더스트 Views282
    Read More
  5. 딴 생각

    Date2019.01.29 By형선 Views301
    Read More
  6. 절망으로

    Date2019.01.15 By형선 Views335
    Read More
  7. 천안 산새

    Date2018.12.24 By영도물시 Views333
    Read More
  8. 물의 씨

    Date2018.11.28 By遲麟 Views272
    Read More
  9. 살며, 배우며, 쓰다(문화의 기원 편 1~6)

    Date2018.11.13 By더스트 Views344
    Read More
  10. 건축가 박진택

    Date2018.11.11 By진진 Views2227
    Read More
  11. 웃음 소리

    Date2018.10.29 By遲麟 Views329
    Read More
  12. 아직도 가야 할 길...

    Date2018.10.26 By오수연 Views256
    Read More
  13. 허영,낭만적거짓 그리고 나

    Date2018.10.26 Byyield Views305
    Read More
  14. 7살 서율이

    Date2018.10.13 By형선 Views663
    Read More
  15. 웃은 죄

    Date2018.10.01 By遲麟 Views334
    Read More
  16. 나라는 여백(餘白) 1 -J의 訃告

    Date2018.09.19 By시란 Views311
    Read More
  17. 자유주의자 아이러니스트 (Liberal Ironist}

    Date2018.09.19 By구절초 Views355
    Read More
  18. 변명과 핑계없는 삶

    Date2018.09.14 By오수연 Views306
    Read More
  19. 나를 보다

    Date2018.09.13 By올리브 Views271
    Read More
  20. 연극적 실천이 주는 그 무엇

    Date2018.09.13 By하람 Views447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7 8 9 10 11 12 13 14 15 ... 16 Next
/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