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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6 09:41

장독藏讀(37회)_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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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藏讀(37회)_ 후기>


*

“내가 오랫동안 ‘응해서 말하기’를 대화의 준칙으로 내세웠지만, 대화 중의 말은 ‘하고싶은 대로’해선 안되고, ‘상대에 말에 준응(準應)’해서 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능한 기분은 죽이고 논지를 살린다는 취지로 말을 이어가면서, 공동노동으로서의 대화라는 가치를 잊지 않아야 한다.”(선생님, 6월 장독 강연 )

 

1. 언제부터인가 나는 공부자리에서 필요한 말을 해야 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분별하는 공부자리의 윤리는, 뱉은 말의 성격을 늘 감찰하게 했고, 망설이고 망설이다 뱉은 말은 언제나 청자에 가 닿기도 전에, 공중空中에서부터 그 말의 성격을 알려왔다. 회수할 수 없는 말의 속성상 낭패감을 맛보기 일수 였고, ‘낭떨어지에서 떨어진 것 마냥 피 흘리는(선생님)’ 시늉을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 얻은 묘수가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챙기는 것이었다.


2-1. ‘할 수 있는 말’은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의 중간 어디 즈음에 있는 말로, 내 존재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존재의 조건을 개시하는 말이다

 타인들과 함께하는 대화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의 분별은 내게 발화한 이후에나 찾아오는 화인火印과도 같았다. 자신이 방금 한 말이 기분에 취한, 혹은 에고를 보완하는, 그도 아니면 고루한 ‘상투어와 관용구(아렌트)’로서의 하고 싶은 말인지, 해야할 말로서 논지를 좇아 옮아가며 대화의 장을 돕는 말인지를 아는 것은 언제나 사후事後적이다. 자신의 조음기관을 통해 발화된 말이 타성을 띄며 돌아온다. 자기의도와 자기의미를 벗겨내고 그 장소의 말에 쓰임(話用)에 따라 되돌아 온 ‘발화 된 말’은 화자를 제 말의 청자로 변용시키며 그 성격을 재구성한다. 이는 발화해 봄으로써 알게되고, 그에 응한 타자의 말을 들음으로써 확인 할 수 있는 사실이다“청자는 화자의 말을 결정할 힘을 가지고 있다(라캉과 정신의학,82).


2-2. 돌아온 말은 빈 몸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장소와 청자에 따른 무게를 가지고 돌아온다. 우리의 공부자리가 단순한 대화会話:かい의 자리가 아닌, 대화対話:たいわ할 수 있는 자리 일 수록, 화자로서의 자기()는 청자로서의 자기를 수반하며 돌아온 말의 중력을 체감한다. 말의 무게는 말한자(話者)의 책임으로, 말한자가 감당해야할 몫이다.(이 책임은 그야말로 자기의 책임으로 결코 타자가 부여한 책임이 아니다. 말해지기 전에 이를 안다면 참으로 지혜로울 것이다.)


2-3. 반면에 ‘할 수 있는 말’로의 관점이동은 사전事前적 성격이 짙다. 우선 준비를 한다는 데에서 사전적이고, 이미 내재한 말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사전적이다. ‘할 수 있는 말’이 사전성으로 일관될 경우, 장소 혹은 듣는 이의 사정과는 별개가 되어 인문학 대화의 현장성을 살리지 못하고 말을 하는 이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그친다.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말을, 발화전 되새기는 것은, 이 정당성과도 관계하는데, 말의 무게가 쌓일수록 감당해야할 몫이 결코 녹녹치 않다는 점에서 옭아드는 존재를 구원?하기 위함이다. 어떤 날엔 비대해진자아로 인해,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날이 있는데, 내 존재의 한계이자 조건으로서의 할 수 있는 말을 구하다 보면 자신에게 솔직해지고(한계), 타인에게 자신의 어찌할 수 없음(조건)을 내보일수 있게 된다. ‘존재Sein와 당위Sollen 사이에 자리한 주체Subjet(선생님,적은 생활,작은 철학,낮은 공부,196,늘봄)’라는 말이, 이럴 때 참 유용하다.). 선생님께 배운바“말이란 청자와 정신적인 관계를 맺는 일이며, 청자와 함께 청자를 위해서, 그리고 청자를 향해서 행해지는 행위이다. 가능한 청자에게 들릴 수 있도록 말해야 하며, 그런 점에서 말하기는 실용성practicality이 우선이다 (선생님,6월 강연 중). 이를 관과한 자기 정당성에만 충실한 말하기는 청자를 상실한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말’에 첨가되는 윤리의 생성에 대화의 현장과 타자(청자)의 있음을 빼놓을 수 없다. 사전에 준비/내재된 말로 대화자리의 논지를 파악하며 할 말을 챙기되, 현장에서의 청/화자의 말을 들으며, 첨부되는 새로운 말과 함께‘공동의 노동으로서의 대화’의 장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는 타자가 편입된 자리에서의 ‘할 수 있는 말’이, 타자에 대한 윤리 없이는 성립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

 “말하기는 사람이 있으니, 필연적으로 보살행입니다. 사람이 있다는 엄정한 사실에 의해 대화하여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말은 전달되기 어려운 게 기본전제입니다.() 단순한 말의 교환이 아니라 앞에 사람이 있으니, 자기완결의 가능이 아니라, 행위의 윤리적 책임으로 사람을 향하여 하는것 입니다.(선생님,6월 장독 강연 )

 

3. 사람이 있다. 이를 아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다. 인문학 공부는 사람을 아는 것이다. 조금 더 섬세하게 말해보자면 인문학은, 사람이 ‘있다/있었다’라는 감수성을 예민하게 발달 시키는 공부이기도 하다‘있는’ 혹은 ‘있었던’ 사람에 대하여 발달된 감수성은, 타자에 대한 인식의 창구를 열며 ‘자기 완결성’에 빠진 단단한 자아에 균열을 낸다. 틈입하는 타자가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강렬하게 다가올 때 자아는 자기 속살을 내보이며 벌어진다. 이 때의 자아는, 자기 완결성/합리성 속에서 완결되던 자기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반복을 수행적으로 이행하며, 자기세계의 경계(비트겐슈타인)에 선, 응할 수 있는 자로 나아간다. 전지전능全知全할 수 없는 인간이 외부를 인식하며 살아가는 데에 쉽게 동원될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 완결성이지만, 공부하는 정신, ‘응하기(선생님)’의 주체에게 이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대하여‘사람이 있다는 엄정한 사실’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물론, 타자성을 거부하며 자기완결만을 재촉하는 이에게 그 달콤함에서 나오시라! 강요할 수도 없다.)


3-1. 우리는 흔히 ‘있다’를 안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자기 연장으로서의 타자일 경우가 많다. 공감하고 동정하고 연민하며 자기 경험/관점 안에서 타자를 상정한다(혹은 상징표상에 갇힌채로). 하지만 타인의 고통은 애써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자기 앞의 타인이 누구인지 알고자한다면, 섣부르게 당신은 누구다!라고 정하기 보다는, /그녀를 살펴 그/그녀와 그/그녀가 선 자리를 배워야 한다. 전체 지형과 맥락속에서의 사람(보편자)을 알되 개별자로서 개성화된 그/그녀를 동시에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그/그녀가 공부하는 이, ‘나보다 큰 나’에게로의 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 이라면, 자기상에 맺힌 그/그녀는 언제나 거기 있지 않음으로, 늘 새로운 만남을 가정해야 한다. 그래서 ‘행위의 윤리적 책임으로 사람을 향하여’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이 있다라는 사실을 감각/감수하고, 나아가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지를 마주할 수 있는 실력이 선행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는, 만남의 순간, 대화하는 순간을, 일기일회一期一會로 삼아 상호를 내보이는 실력을 필요로한다는 말이기도다. 사람이 있다라는 감수성이 요청되고, 그 장소에 걸맞는 예가 요청되는 순간이다. ‘행위의 윤리적 책임’자로서. (사족_‘장소에 걸맞는 예’는 논지의 흐름상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깨친다는 것은 우선 사무친다는 뜻이다. 사무친다는 것은 깊이 스며든다는 것인데, 이것의 함의는 다만 ‘심적 표상의 재설정’이 아니라는 데 있다 (선생님, 그림자 없이 빛을 보다, 54, 글항아리).

 

4. ‘사무친다’라는 말을 체감하듯, 우리가 대화에 실패하는 이유 중의 한가지는 이 보살행의 의지와 기량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선생님,6월 장독 강연 )”라는 말이, 정확히 나를 적중(hitting)하였고, 사무쳐 내 존재/인식의 한 구석에 스몄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혹은 말해질 수 없었던 ‘무의식에 잠재된 실재(브루스핑크)’가 외부로부터 상징화 되었다. 언제나 자신이 무엇/누구인지를 알려오는 것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박진하는 타자의 말이다. 타자는 그 말과 그 존재로서 자기의 자의식/자기표상 아닌 자기를 알려온다. 우회하여 돌아오는 자기는 서글픈 날이 많다. 하지만, 자기 존재를 치는 타자의 말이 자기의 진실을 알려오듯, 타자를 안다는 말은 자기를 안다는 말과 이음동의어이다. /그녀가 선 자리를 살필 줄 아는 ‘동정적 혜안’의 기지機智, 자기가 선 자리가 어디/무엇인지를 수용/감수하게 한다. ‘동정적 혜안’은 타자를 향한 것만이 아니다.

 

4-1. 사실, 장독 후기를 이렇게 장황히 쓰게 된 연유가 바로 이 사무침의 고백이기도하다. 관계의 기울기를 고정시켜 대화의 문을 닫아버리는‘고백은 반칙’이며, ‘도덕적 자리에서 쉽게 반성함으로 행위의 책임을 면피하지 말고 다음에 나아갈 방향을 먼저 모색하라’라는 조언(이는, 내 행위의 책임을 쉽게 벗어던질 생각하지 말고, 그 책임의 무게를 버티며 앞으로 나아가라라는 한‘동무’의 매서운 말이었다.)을 여전히 기억한다. 또한, 다리를 절 지언정(鼈千里)  몸을 끄--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학인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유효하다. 그러나, 마음에 구조의 변동을 일으키는 정동에의 울림은 상징화 되었을 때 실체로 파악되고 구체성을 띄며 해소될 방안/방향을 표지한다. 이는 구차함을 뒤집어 쓰며 말을 할 만한 충분한 가치이다. 실패의 자리는 항상 뼈아프다. 기량을 따지기도 전에, 자기 의지의 박약이 더욱 컸다라는 사실에 더욱 뼈아프다.

나는 실로 그러했고, 나의 대화는 실로 그런 것이었다. ‘사람이 있다는 엄중한 사실’과 ‘자기완결성’의 줄타기에서 한 쪽으로 치우친 위태로운 모습이 늘 반복되었다. 어떻게 하면 살고자라는 변명으로 무뎌지는 감수성을 되살리고, 그 정신과 접속할 수 있는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어떤 마음의 경계가 작동되어야 사람을 듣게 되고, 더불어 서로의 말이 올라 올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늘 모르지만 늘 알고 있고, 늘 알지만 늘 모르는 그 말의 체현이 필요한 때이다.



*

“말하기의 출발은 듣기다. () 내가 ‘듣다가 죽어라!’고 할 때의 취지는 잘 듣기의 문제를 제기함과 동시에 발화자의 기억력을, 상상력을, 그리고 무의식을 틔우기 위한 것이었다. () 말하기-듣기의 행위는 인간 존재의 내면을 깊이 건드린다.(선생님, 6월 장독 강연 )

 

5. 그 날(장독),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면 24명의 청자가 귀를 귀울였다. 자기소개시간을 이용해청자들은 순서에 따라 화자의 자리로 이동했다. 한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24명의 청자는 그 말이 다하도록 가만히 들었다.

<장숙>에서 공부하다 보면 말이 고이는 장소를 발견하게 될 때가 있는데, 내게 그 경험은 주로 선생님께서 계신 자리였고, 보통의 경우, 선생님께로 말이 고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골목길 사이사이에서 저희들끼리 어울리던 말들이 선생님 계신자리로 모여드는 느낌이었다. 그 날의 가만히 듣는 귀기울임의 장소가 역시 그러했는데, 그 날은 유독 <서숙>이라는 장소 전체가 듣는 이들로 가득 메워진 느낌이었다. 이런 때엔, 말이 장소에 스민다. 내 말이 그 장소의 모두에게 스며들 때는, 그 스미는 말로 인해 내 존재가 물매진 어딘가로 이동해 지금까지 감각하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이동하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니 어리둥절하여 작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내게 더 자세한 설명이 요구되어지는데, 말한 그것이 전부일 뿐이어서, 보탤 말이 없다. 그냥, 느낌인 것이다. 그리고 그 느낌을 내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내 안에 생성된 감각이미지(다마지오)들을 적당한 표상과 말로 의식화해 옮긴 것이니(주의 기울이기), 내 말에 공감과 이해를 받는 것은 기대하지 않는다.(참조 : “신경생물학적으로 ‘지도화된 패턴들’이 우리가 이미지라고 부르는 ‘마음속 사건들’로 변화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마음 속 사건들은 느낌과 자기 관점을 포함하는 상황의 일부가 될 때만 마음속 경험, 즉 의식이 된다./안토니오 다마지오, 느끼고 아는 존재, 79, 흐름출판)


5-1.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알게 된 것은, 이 듣기를 체현한 선생님과 동학들을 만난 행운에 의해서이다. 어떤 존재와의 조우가 내가 어떤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로 인도한다. 할 수 있는 말은, 자기 안의 역사가 바뀌면서 그 층위를 달리 하고, 청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또한 그 말의 수위가 달라진다. 소리없이 가만히 귀 기울여 입을 타고 나오는 말의 선으로만 집중하는 기척은, 화자의 집중까지 이끌어 그 집중을 타고 직조된 말을 끌어올린다. 듣는 이의 듣는 실력, 그러니까 수용가능한 범위에 따라 화자의 말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생각이 오는 데 그 생각은 어떻게 오는가 어디서 오는가.(선생님, 23년 숙인맹진 )“라는 질문을 지금 받는 다면, 밖에 있는 나로부터 끌어올려진다라는 말을 해도 좋을 듯 싶다. 이미 내재되어 내 몸과 결구된 언어를 인정하되 ‘듣는 이’의 지평이 가져오는 ‘말 짜임/바뀜’의 성격을 감안해서 말이다.


5-2. 언젠가 선생님께서 이름의 일회성을 알려주신 적이 있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그 순간 생성되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이름이 호명되면서 그 이름에 걸려, 있지 않았지만 있게 되는 존재가 불려나온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게는 특히 그 순간이 아름답게 연상되었는데, 그 불려오는 일렁임이, 있다가 다시 소멸되는 번짐이 지속될 수 없는 ‘아름답고 선한 것의 명멸(선생님)’과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어떤 말의 탄생이 그런 것 같다. 대화의 현장에서 아름다웠다가, 각자의 기억/추억 속으로, 혹은 텍스트로 고정되면서 함께 저장되지 않는 빛이 있지만, 그 말이 그곳에 있게 되는 것은 청자의 요청, 존재의 말을 부르는 그 (충실히 들음으로 호명하는)요청에 의해서이니 말이다.

6. ‘할 수 있는 말’에 타자의 윤리, 그러니까 타자의 있음을 알고, 그 정신 혹은 존재를 감수하는 듣기가 가능하게 된 후의 ‘할 수 있는 말’은 아마도, 대화의 현장에서 ‘해야 할 말’과 조금 더 가까워 있지 않을까 싶다. 선생님께서는 대화의 실천 요강要綱으로 상대가 6을 말하게 하고, 자신이 4를 말하는 최선을 알려주셨다. 이는, 대화(오가는 기표)의 양으로서 6을 내어주는 것만이 아니라, 6을 말하는 화자의 정신/존재를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여전히 특정한 때, 특정한 사람의 특정한 말을 잘 들을 수 없다. 존재 인정이 선행되지 않는 듣기의 문제일 수도 있고(그 말이 내게 흡수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맥락에서 타자성에 대한 거부), 내용을 섬세히 살피기 보다는 형식을 거칠게 인지하며 효용을 빠르게 판단/처리해 버리는 읽기 습관(명백히 고쳐져야할!!)의 연장일 수도 있다. 어떻게 6을 내어줄 것인가. 어떤 마음의 경계가 작동되어야 6을 내어주는 것이 가능해 지는가. 오늘도 몸을 끄--, 생각을 뒤로 한채,다음 디딤돌이 있는 곳을 향해 발을 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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