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로 살이 붙어요>
오해로 새 살이 돋고
비방으로 피가 돌아요
괜찮아요
숨을 죽이고
거품은 삼키세요
닭보다 낮게 날고
시체보다 조용하세요
당신을 염탐하던 짙은 그림자
늘 악패듯 집요했지만
이미 햇살을 물고 있지 않던가요
죄없는 시간을 찾거든
걸음을 돌려 억울함의 동굴 속으로 밝게 지나가세요
괜찮아요
오직 캄캄함으로 밝아오는
신생의 가마 속으로
맺힌 말을 삼키고
원념보다 빠르게 지나가세요
괜찮아요
k선생님,<<옆방의 부처>>, 73쪽
*오해는 일종의 '죄'이며 오해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이해의 욕망이 있듯이 오해의 욕망이 있습니다.
이해와 오해를 겨끔내기로 받아야 합니다.
깨끗하게 풀 수 있는 것은 빨리 풀고, 풀 수 없는 것은
수용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불천노(不遷怒) 불이과(不貳過)
화를 옮기지 아니하며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공자가 수제자 안연의 인품을 두고 평가한 말입니다.
반복적으로 실수를 하는 것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改(개)는 자신의 몸을 쳐서 버릇을 고친다는 것입니다.
즉 몸과 마음과 뇌에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많이 가져야 멀리 갈 수 있습니다.
*개념이 만드는 새로운 길
인간의 마음은 그 유례없는 민활성과 그 잡다함으로 인해
개념적 장치가 없이는 쉽게 심리적 난맥상에 빠져
문명 문화적 성취에 이르는 사유를 꾀할 수 없습니다.
개념은 인간의 사유가 조리있게 서게 하고,
또 깊고 먼 데까지 정확히 도달하도록 돕습니다.
*외국어가 만드는 새로운 길
영어의 접속사 특히 관계사는 마치 진흙을 으깨어서
고층건물을 지어내는 놀라운 수완을 연상시킵니다.
반면 한글은 관계사의 부족으로 고층 건물을 짓지 못합니다.
관계사의 활용과 조어(造語)능력이 탁월한 독일어의 경우,
웅장하고 심오한 느낌까지 주는 장문의 구성은 그들이 이어온
전통적 사유의 능력이 어떤 마음의 길들에 의탁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알려줍니다.
마음의 길을 고쳐야 실수를 거듭하지 않는 것,
즉 두번만에 고치기가 가능해집니다.
어떤 버릇을 고치기가 어려운 것은 길을 내는데
비용과 노동을 필요로 하며 무의식이 저항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기본 학습법은 모방인데, 좋은 모방의 대상이 있으면
사람이 좋아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장소를 트고 누구와 말을 섞느냐는 중요합니다.
*사린(四隣)의 윤리
개입은 존재의 방식입니다.
인간은 이미 세상 깊이 개입되어 있으며
또한 세상속으로의 행위를 통해 앎을 얻어가는 존재입니다
개입의 지점을 응연히 읽어냄으로써 윤리의 출발점을 내 쪽으로
한 발짝 옮겨오는 일은 '다 내 탓'이라는 종교주의적 낭만적
슬로건이 아닙니다.
개입하고 어긋나며 버성기는 세속의 관계속에서 그게
실질적이며 책임있는 출구이기 때문입니다.
로드킬 당한 동물을 묻어주는 것은 사람과 사람사이가 아니라 모든 존재와의 융통에 손을 내밀면서 생긴 버릇입니다.
실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정한 것이 사린의 윤리입니다.
*점(占)을 치는 것이 왜 인간의 정신에 좋지 않은가
점을 치는 것이 인간의 특성과 구조와 연관이 되어
이것으로 윤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정신의 자람을 희망하는 사람, 공부로 성취를 보겠다는 사람은
점을 멀리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의 정신은 미래를 모르게 되어 있으며 자신의 개입으로
만들 뿐입니다.
장독에 참석하지 못한 때는 더더욱 단빈의 후기를 기다려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