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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7 16:46

장독(藏讀)후기 1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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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꾼들의 자리>


이 일꾼들은 곁말을 죽이고

그 틈사위에 찾아드는 다른 기별의 힘으로

일이 제 길을 얻게 한다

왕년(往年)이 없고 사념도 없어

그 일은

금시(今是)로 그득하다


표정은 예치(預置)하고 생각은 체(剃)질 되어

사람을 응대하고

물건을 수접(手接)하는 빛을 이루어

일하는 자리요 곧

신(神)의 자리


기분을 저당한 이 일꾼들은

그 적은 마음자리의 가늠자 위로 아득히

제 몸을 얹어

일을 이룬다


k선생님, <옆방의 부처> 글항아리





이반 일리치는 문화의 중심은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식투자와 같이 교환 가능한 가치는 자본주의의 쾌락이 되어 인간을 포섭하였고 이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희일비하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공부의 '樂'과 같이 공약이나 교환이 되지 않는 쾌락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자득(自得)이 필요한데, 공부의 자득은 설명하기 어렵고 정신에 쌓아두는 것이라 유통이 어렵습니다.



현대인들은 평등의 이념에 물들어 있어 스승이라는 말이 애매해지고 있습니다. 공부는 에고와 정면승부를 하는 것으로, 제한된 노예되기로 에고를 넘어가고 각자가 선택한 스승에 대해  죽어주는 연극이 필요합니다. 티베트의 성인인 밀라레빠는 스승으로부터 많은 모욕을 받았고 그 모욕을 견딤으로 부처가 된 경우입니다. 배우는 과정이 모욕이 될 수 있겠지만 고개를 숙이고 스승의 권위를 인정하는 연극이 필요합니다.



跂而望矣, 不如登高之博見也(기이망의, 불여등고지박견야)

발돋음해서 보는 것이 높은 곳에 올라 넓게 보는 것만 못하다는 순자의 가르침처럼 홀로 생각하는 것보다 선현들이 남긴 것이나  좋은 스승 혹은 좋은 동학과 더불어 공부하는 것이 낫습니다.





*옆방의 부처

<일꾼들의 자리>


일꾼들이 어떻게 일을 하는가에 따라 한 사회의 수준이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한말 하급관리가 국가를 망친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그 한 예로 순조때 지방호족인 하급관리는 죄인을 풀어주어 잡지 못하도록 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의 평가를 나쁘게 하여 쫓아내기도 하였습니다. 막스베버 또한 좌파와 우파의 대결이 아닌 관료와 인문학자의 대결이 펼쳐진다고 할 만큼 관료를 경계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일반적인 사회문제를 해결하기위해, 관료가 일꾼들의 일을 잘 돕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짜들의 노동은 사람의 정신을 키울 수 있는 장소가 되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며, 그 모든 좋은 장소는 사람들의 실력이 진짜가 되도록 돕는 기초적 여건입니다. 즉 일을 하면서 자기를 키워 나간다는것은 장소화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장소화는 사물을 구원하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일과 정신을 결부시키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봄날은 간다

<메타포에 능했으면서도 진리에 답하지 않았다>


예수, 부처 그리고 공자와 같은 이들은 실체가 없는 진리를 과연 설명했을까? 그들은 민중이 이해하기 쉽도록 메타포를 활용하여 설명하였고, 현장에서 자신의 꾀와 실천으로 민중에게 응했던 사람입니다.  


嫂溺援之以手者, 權也(수익원지이수자, 권야-맹자)

남여간에 (물건등을) 주고 받을 때 친히하지 않는 게 예의입니다. 하지만 형수가 물에 빠졌을 때 손을 뻗어 구해주는 것은 권도입니다.


예수는 기이한 재능을 가진 이로써 이치나 진리에 침묵하고, 현장에서 응하면서 민중들을 대했습니다.  공자 또한 같은 질문을 받아도 상황에 따라 다른 말로 응하였습니다.




*차마, 깨칠 뻔 하였다

<또 다른 복음>


감사하기는 자본주의의 교환체계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인사치레를 통해 '계산은 끝났어 (算了, we' re even)'라는 의미가 숨어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돈을 받았다하여 정신이 뒷갈망되는 것은 아니며 지혜 또한 곧바로 교환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받지 못하고 오해를 받는다고 하여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오해로 살이 붙기도 합니다. 밀라레빠의 경우처럼 오해나 수모가 성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하니 마음이 자라는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부당한 경험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리비도에 얽힌 마음으로, 현실과 환상 혹은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기도 합니다. 다만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모든 사태가 명백해질 것입니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단막증애 통연명백) 공부를 하는 사람은 좋아하거나 미워한다는 것에서 나올 필요가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일본을 방문하셨을 때, 해질 무렵 한 제빵사가 빵을 한참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녀에게 과연 빵을 만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말이지요.


 일본에서 선생님의 경험과 대비적으로 저는 한국에서 어떤 가게에 들어서서 주인을 대하게 되었을 때, 소비자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에 마음이 상하거나 아쉬움이 남는 경험이 더러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마저도 환자를 물화시켜버리는 경우가 빈번하다보니 병원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이 꺼려질 때도 있습니다.


사람의 정신을 키울 수 있는, 진짜의 노동이 있는 그 곳은 세상에 없는 특별한 장소일 것이고 그 곳을 방문하는 이에게는 다른 감각이 피어오르겠지요. 그런 곳으로 안내받고 싶습니다. 또한 제가 거한 자리가 저의 노동과 정신이 서로에게 빛을 발함으로 일구어진, 그런 자리가 되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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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泥子 2022.12.29 18:19
    <또 다른 복음>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라고 말한 포이어바흐도 종교의 본질을 인간의 본질에 귀착시킵니다. 인간은 유심(唯心)으로도, 유물(唯物)로도, 어느 한쪽으로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존재일 것입니다. 인간의 차분함과 의식의 꾸준한 집중 능력은 인간의 일차적 생존과 무관한 내면성, 초월적 성향을 확보해왔습니다. 

    '감사받지 못하는, 이해받지 못하는, 상처 속에 슬픔을 옮기지 않는' 정신은, 자기 초월의 좁은 길로 들어선 정신일 것입니다.

    공부를 통해 자기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학인에게 '짧은 볕뉘 하나에 오롯이 기뻐'할 줄 아는 것과 '좋아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생활양식은 분명 '또 다른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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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肖澹 2022.12.30 12:15

    *
    바람에도 나무에도 의지하지 않고,
    다만 현장에서 도울 수 있는가를 주안(主眼)으로 하여,
    자기 재능의 모두를 건, 그런 얼굴들을 알고 있습니다.
    꿀떡 삼킨 변명의 말과 서러움의 말을 모른 체하며,
    다만, 자기 싸움에 여지를 주지 않아, 스스로 되어간 그런 얼굴들이요.
    *
    하나의 어휘 속에 숨겨진 무수한 사상의 지류(支流)를 밟고,
    황무지 길을 걸으며 돋아나는 새싹의 기미를 마중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핍진하여 고립되지 않으면서도, 선택한 소외의 길 또한 마다하지 않는,
    사방이 뚫린 평지 위의 사람이고 싶습니다.

    **

    공부의 현장엔 삶의 결결에 스며 존재를 채우는 말이 있습니다.

    '*'는, 그 날 공부의 장을 되돌아보며 떠오른 단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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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길 2022.12.30 23:07 Files첨부 (1)

    그림2.jpg

    '받지 못했던 것', '하지 않은 것'을 통과하며 오히려 나아가는 정신을 상상합니다. “오직 이해받지 않아서야 가능해지는 걸음”(k선생님)이 있다고 배우기도 했어요. 지난 어느 날 '또 다른 福音'을 필사하여 책상 앞에 붙였습니다. (마음에 붙이고 싶었어요) 허약한 자아가 위로받고 싶다고 요동칠 때마다, 나직이 존재를 다독이고 위로하는 장소로서 이 글을 의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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