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Blackwater Woods Mary Oliv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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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k, the trees |
보라, 나무들이 그들의 몸을 기둥으로 바꾸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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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light, |
빛의 기둥으로, 계피와 완성의 풍부한 향을 뿜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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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long tapers | 부들의 긴 꼬리가 흩날려 푸른 연못가로 떠다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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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the ponds, | 모든 연못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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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less now. | 이름이 없지. 해마다 내 인생에서 배운 모든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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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y life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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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돌아간다네 : 불(fire)과 상실의 검은 강 - 그것의 다른 이름은 구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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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salvation, | 그 의미를, 우리 중 누구도 알지 못하리.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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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must be able | 당신은 세 가지를 할 수 있어야 하리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 당신의 삶이 거기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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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inst your bones knowing | 뼛속까지 그것을 끌어안기; 그리고, 놓아주어야 할 때가 되면 놓아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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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Letter from Home
Mary Oliv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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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sends me news of bluejays, frost, Of stars and now the harvest moon Here where my life seems hard and st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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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내게 소식을 전해왔어, 어치새, 서리, 별들, 그리고 이제 황폐한 언덕 위를 달리는 추수철 달에 대하여. 그녀는 가볍게 추위와 고통을 말하고 이미 철 지난 것들을 나열했어. 여기, 힘들고 느린 삶에서 나, 문 옆에 쌓인 멜론이며 펜넬과 로즈마리, 그리고 딜로 가득찬 바구니며, 미처 수확하지 못했거나 낙엽 속에 숨겨둔 것들이 검게 변해 떨어진다는 소식을 듣네. 여기, 익숙치 않아 힘든 삶 속에서 나, 별들이 떠오르고, 서리 내리고, 어치들이 노래할 때, 그녀가 전해오는 야생의 활기를 읽네. 실패한 해(year)라 해도 현명하게 소용돌이치는 그녀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할테지. 사람들은 항상 삶을 계획하지만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는걸 알기에. 울지언정 나에게 하소연하지는 않겠지. 나, 그녀의 이름 옆 X자를 살짝 눌러보고 일어서며 편지를 접어. 그리고 봉투를 기울이면, 보리지(서양지치), 인동덩굴, 운향풀 부스러기가 흩날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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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좋은 문학작품의 한 특징이라면 읽을 때마다 새롭게 해석되고, 전에는 주목하지 않았던 구절이 새롭게 눈에 들어오는, 그런 ‘낯설게하기’ 혹은 ‘다가오기’일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In Blackwater Woods라는 시를 처음 읽었을 때에는 To live in this world you must be able to do three things: to love what is mortal; to hold it against your bones knowing your own life depends on it; and, when the time comes to let it go, to let it go 이 구절들을 좋아하였어요. ‘죽을 운명인 것들을 사랑하기. 그리고 놓아주어야 할 때가 되면 놓아주기.’ 뜨겁게 살아내야 할 우리의 생 전체를 관통하는 표현 같아 보였거든요. 하여 좋은 시로 잘 간직해 두었다가,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읽어보니 이번에는 the fires and the black river of loss whose other side is salvation이라는 구절이 와 안겼어요. ‘산불로 검게 변한 강의 다른 면이 구원’이라니! 아, 그 사이 이 구절의 의미를 넉넉하게 이해할 정도의 삶의 고비들이 제게 있었나 봅니다. 전화위복 같은 일들 말이지요.
가장 최근, 다시 이 시를 읽었을 때, 이번에는 and every pond, no matter what its name is, is nameless now라는 구절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었어요. ‘모든 연못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이제 이름이 없지.’ ’이름이 있었는데 이제 이름이 없다니? 이거 무슨 말장난인 것 같은.’ 하고 이해하기를 포기하려다 시를 처음부터 다시 보니 나무가 빛의 기둥이 되고, 부들의 긴 꼬리가 흩날려 강으로 떠가는 것이 존재의 확장으로 이해가 되는군요. 나무라는 이름으로 명명될 때에는 나무일 뿐이었지만, 나무라는 이름에서 놓여나는 순간부터 나무는 더 큰 빛의 존재로 확장되는 거죠. 민들레 꽃씨처럼 퍼져 강물에 떠가는 부들의 긴꼬리 또한 존재의 확장이라 볼 수 있겠지요. 하여 이름이 있을 때, 그 이름만큼의 존재에 불과했던 연못도 이제 이름을 잃음으로 강이나 바다와 같은 다른 가능태로 존재를 넓혀 가는 거죠. 삶과 죽음에 대한 안이한 위로보다, 생명을 다한 나무나 부들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빛의 기둥으로, 혹은 강물 따라 흘러 다음 해 봄날 다시 부들로 피어난다는 메리 올리버의 통찰을 통해, 生이 다한 후 맞는 死는 끝이 아니라 더 큰 生으로 가는 과정(생과 사가 다르지 않음_不二)일 수 있음이 부드럽게 이해가 되었어요.
다음번에 다시 이 시를 읽게 될 때에는 어떤 새로운 구절이 다가와 안길까요? 누군가 “좋은 문학작품이란?” 이라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양파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벗겨도 벗겨도 새로운 껍질이 나오는 양파!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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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문학작품’은 마치, ‘공부하는 사람’같습니다.
만나는 장소에 따라 시간에 따라 그리고 그 흐름에 따라, 본연을 간직하면서도 재서술의 가능 안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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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must be able
to do three things:
to love what is mortal;
to hold it
against your bones knowing
your own life depends on it;
and, when the time comes to let it go,
to let it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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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한다면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여, 그 사랑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를 삶의 풍요로움을 알고 싶습니다. 그 사랑을 놓아줄 수 있을 땐, 삶의 한 시절 시절이 마감되고 생성되는, 봄 풍경 같은 아름다운 순간들을 맞이할 수도 있겠죠. 문득, 죽음이 개입해오는 삶이 사라질까, 찾아오는 두려움을 모른채 합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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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Letter from Home 을 읽다보면 시골에서 보낸 유년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무척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다가왔어요. 아침에 서리가 내리면 마을의 논은 하얗고 밥짓느라 집집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굴뚝에 피어오른 하얀 연기는 서로 안부를 묻는 것처럼 반갑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