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언어일까, 언어의 인간일까. 나의 말인가 싶다가도 어느새 말은 나를 비켜선다.
같은 말도 ‘누구’에 따라 울림과 파장이 달라지는 현상은 발화자의 삶을 지시하는 듯했다. 주로 설교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설교가 좋으면 좋은 대로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말하는 이의 삶과 연결지었다. 언어와 삶의 밀착을 포착하긴 했지만 인과적으로 대상과 언어를 판단했고 그렇게 개입하곤 했다.
그런데 현대 철학과 비트겐슈타인('Auch Worte sind Taten')은 ‘speech-act’라는 명제를 전한다. 처음듣기에도 말이 곧 행동이라는 설명은 현실과 더 가까웠다. 존재를 흔들고 문을 열기도 닫기도 하고, 묶기도 풀기도 하는 활동으로서의 말(행동). 어떤 말은 계시적 성격을 가지고 미래에 와 있다. 인간이 복잡 미묘해지는 사이 그러한 인간성이 언어에도 반영된 걸까? 여튼 나는 ‘speech-act’라는 낱말에 흔들려 활동하는 언어를 경험하고 있다.
매 <속속>에서 이뤄지는 ‘자기소개’ 시간, 학인들의 말을 듣는다. 적실한 언어를 고르려는 노력에 물들어 나도 그런 말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설명한 대로) 하고자 했던 말보다 말해진 것에 내가 있다. 몸에 내려앉지 않은 말, 나도 남도 소외시키는 말, 후과를 책임지지 못한 말들로 엉뚱하게 나는 나를 잘도 소개했다. 하고서 알게 되니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말해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곳은 거듭 '시작(始作)'하는 공부의 자리가 된다.
말이 적극적인 활동이라면, 듣기도 적극적인 개입이다. 그(녀)도 나처럼 말에 흔들리고 어긋나며 이동, 이동 중이라는 이해는 다른 ‘듣기’의 개입을 요구한다. 그(녀)도 나처럼, 나도 그(녀)처럼 재구성될 미래의 말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듣는다.
몇 개월 전 sns 아이디 문구 란에 ‘Hirt der Sprache(언어의 목자)’라고 옮겨 적었다. (왜 그랬을까?) 새로운 말을 배우고 사전을 찾고 글을 쓰고 노동하는 사이, 타자의 언어(라캉)가 인격을 얻고 재서술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거짓 아닌 말, 변명아닌 말이 머무는 장소에 '언어의 목자'도 있다.
"알면서 숨긴 말과 변명으로부터 스스로 삭제한 말과
너무 고와 바람속에 날려버린 말들이 쌓여서 정신의 화석이 생기는 것이다."
(<집중과 영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