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하기(das Philosophieren)를 배우라'(칸트)
2. 칸트의 인식론을 구성설(構成說)이라고 한다. 이는 칸트의 인식론이 이른바 물자체(Ding-an-sich)로부터 소외된 점을 알린다. 인간 인식의 대상은 물자체가 아니라, 인식의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대상(Gegenstand)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그 과정의 초점은 경험하는 대상(객체)에도, 인식하는 이성(주체)에도 있지 않으며, 이로써 칸트의 성취가 영국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을 화해/지양하는 차원을 지닌다. 그것은 주객이 어떤 방식으로 만나 인간의 인식(지식)을 구성해내는가에 있으며, 이 과정을 도시적(圖示的)으로 해명한 게 <순수이성비판>의 요목이다.
3. 칸트의 '비판'이 아닌 게 있다면,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비트겐쉬타인이나 하이데거가 별 가치없는 것으로서 貶視한) '문화비평'의 비평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비판은 이성(Vernunft) 그 자체, 즉 순수이성(reine Vernunft)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성의 능력(Fakultät/Fähigkeit)에 관한 비판인데, 이는 당연히 독일식의 '능력심리학'의 역사적 맥락과 이어져 있다. 여기에서는 이성의 능력을 세분(감성/오성/이성 등)하고, 각각 그 기능과 한계와 서로간의 관련성을 설명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초월적 관념론'이 얹혀 있는 초월성의 계기는 바로 이 비판의 성취에 의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4. 질료(Materie)는 물자체가 인식의 대상으로 수용/포섭되는 과정에서 생긴다. 감성(Sinnlichkeit)이 받아들이는 그대로의 것이면서, 아직은 잡다하며 직관적으로 정돈되지 못한 상태다. 직관(Intuition)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질료가 감성의 형식(시간/공간)과 결합하면서 이루어진 결과, 즉 낮은 상태의 인식인 셈이다.
5. 감성(Sinnlichkeit/sensibility)은 경험적 직관의 대상(Erscheinungen)을 처음으로 수용하는 마음의 기제다. 여기에서도 질료-형식의 콤비네이션이 작동하는데, 감성의 선험적(a priori) 형식을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제시한다. 예를 들어 이는 물론 유교에서 말하는
6. 오성/지성(Verstand)은 감성이 얻은 지각에 보편타당한 위상을 제공할 수 있는 마음의 기제다. 혹은 감성적 직관이나 그 표상이 개념으로써 통합되는 과정을 담당하는 과정이다. 칸트의 유명한 말처럼 '개념없는 직관은 공허하다(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고 한 게 여기에 해당한다. 오성도 감성의 경우처럼 역시 질료와 형식의 결합에 의해서 지식을 생산/구성하게 된다. 그리고 칸트는 이 오성의 형식을 형식논리학적 판단의 종류에 의거해서 각각 3개씩의 항(項)을 지닌 4갈래(質/量/관계/樣相), 12개의 범주로 펼쳐 보인다. 가령 흄의 회의론적 경험론에 의해서 붕괴의 위험에 놓인 인과율(Kausalität)도 바로 이 오성의 선험적 형식에 의해서 구출되는 것이다.
7. 이성(Vernunft)은 (뇌처럼) 우선 세게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런 뜻에서,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고 세계의 한계(Das Subjekt gehört nicht zur Welt, sondern ist eine Grenze der Welt.)'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에 상응한다. 그러므로 이성은 심리학적 의식공간이 아니다. 칸트의 비판이 '순수이성' 그 자체를 대상으로 삼듯이, 이성은 선험적 보편성을 지니며 따라서 '의식일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칸트의 이성 개념은 겹으로 쓰이는데, 그 협의(俠義)는 '추리하고 종합해서 결론을 이끌어내는(schließen)' 기능이며, 광의의 이성은 감성-오성-(협의의)이성을 포함한다.
8.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가 명시적으로 내세운 목표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칸트의 형이상학은 모든 경험에서 독립해서, 즉 선험적으로(a priori) 접근할 수 있는 인식을 가리키는데, 신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성, 혹은 자유와 같은 '이념'은 이론 이성의 인식대상이 아니다. 칸트는 전통적 형이상학을 이성의 월권(越權)으로 봐서 인정하지 않고, '변증론적 가상'이라고 却下한다. 이 이념들이 이론적으로는 가상으로 비판되지만, 실천이성적으로---즉, 인간의 도덕적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반드시 필요하며, 따라서 '요청(Postulat)'될 수밖에 없다는 게 칸트의 독특한 주장이다. 자유의 이념이 성립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행위는 물리세계의 인과에 종속될 것이다. 영혼의 이념도 개인의 도덕성이 생애 一周期 속에서 완결될 수 없다는 사실 속에서 그 요청의 뜻이 있다. 흥미롭게도, 권헌익(<베트남 전쟁의 유령들>)이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유령의 변환적 과정은 비록 종국에는 종언을 맞이할 수도 있지만 결코 종결되지 않는다"는 인류학적(!) 보고를 제출한 것은 비록 완전히 상이한 논의의 차원이긴 하지만 몹시 흥미롭지 않을 수가 없다. 신(神)에 관한 믿음 역시 개인의 도덕적 행로와 업보를 완결시킬 수 있는 이념적 장치인 셈이다.
9. 칸트가 말하는 도덕적 행위는 개인의 심리나 주관적 상황의 차이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의 윤리학은 '형식적'이다. 오직 '선의지(ein guter Wille)'를 행하려고 하는 의무감에서(aus Pflicht) 나온 행위만이 도덕적이다. 그래서 "도덕적 의무감은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행위의 필연성이다(Pflicht ist die Notwendigkeit einer Handlung aus Achtung fürs Gesetz)"(<도덕형이상학의 정초>). 그러므로 칸트 윤리학의 잣대에서는, 예를 들어 애국, 기부, 애정, 혹은 측은지심 따위의 구체적 행위 덕목은 준칙(Maxime)의 차원으로 떨어져서 도덕적 보편성의 요건을 얻지 못하게 된다. 행복을 추구하는 생명 일반의 운동을 포기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의무가 문제인 한 우리는 행복을 전혀 고려해서는 안된다"(<실천이성비판>)는 것이다. 비록 선행(善行)을 행하더라도 그것이 행위자의 변덕, 감상(感傷), 허영심(Eitelkeit), 만족감 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도덕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윤리학은 결과론이 아니라 동기론에 가깝다.
10. 칸트의 윤리학은 형이상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이를 '도덕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양심 대신에 操心'(R. 로티)과 같은 경험칙(經驗則)이 아니며, 벤담(J. Bentham) 류의 공리주의도 아닌 것이다. 윤리학적 실천의 조건으로서 형이상학적 이념(신/영혼불멸/자유)이 재소환되는데, 이론이성이 감성의 자리에서 포착할 수 없는 것으로서 포기한 이 세가지 개념이 윤리학의 규제적 이념으로서 요청되는 것이다. 이론이성이 초월적 월권(越權)을 행하는 것처럼, 칸트는 실천이성도 무제약적 지향에 나선다고 하는데, 이 지향의 대상을 일러 이른바 '최고선(summum bunum)'이라고 부른다. 칸트의 설명에 의하면 최고선은 덕과 행복의 완전한 결합이다. 따라서 이 개념은 도덕 형이상학의 구조와 성격을 규정하게 되는데, 칸트가 제시한 바 실천이성이 요청하는 세가지 이념은 '최고선은 어떻게 실현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인 셈이다.
11. 칸트의 종교관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광신적 종교의 망상은 도덕적 이성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가 열거한 망상신앙(Wahnglaube)은, 대략, 객관적 법칙에 의해 가능하지 않는 것을 경험에 의해 인식한다는 주장, 혹은 기도 등의 단순한 자연적 수단이 신의 은총을 초래할 수 있다고 믿는 것, 등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은총의 수단(Gnadenmittel)'은 이미 그 자체로 모순을 포함하며 일종의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이성의 한계 내에서 사유되어진 종교'는 곧 '착한 행위의 종교'이며, 이를 위해서 필요한 신(神)은 도덕원칙들의 입법자가 된다. 각자가 착한 행위의 주체가 되려고 하지 않으면서, 법규적 교리의 신앙고백, 예식, 기도 등에 의해서 신의 마음에 들려고 하는 짓은 미신이며 망상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