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DSL. 2024-03-23
아이들 책이었는데, ‘방귀에 색깔이 생긴다면’이라는 가설로 시작하고 있었다. 무형의 배출물을 식별하게 되었을 때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 하는 내용이다. 방귀야 무해한 편이니 잠시 당황스럽긴 해도 크게 문제가 될까 싶다. 하지만 그 외, 몸에서 나가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여 본다. 무의미한 잡음이나 이산화탄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신적 존재인 한, 그(녀)는 시선과 언어를 통하여, 생각으로, 만짐으로, 갖은 활동을 매개로 제 속에 든 것을 밖으로 내놓는다. 이 글에서 잠시 건드려 보려는 것은, 그렇게 속에 든 것이 밖으로 나오는 형식 중 하나가 배설-적(새어 나가게 하는)이라는 점.
배설은 불가피하다. 섭취하고 남은 찌꺼기나 부산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야 산다. 배출된 것의 스펙트럼도 다양한데, 우리가 필연적 순환에 순응하며 양질의 음식만을 먹는 것도 아니고, 음식만을 삼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소화(消化) 시켜야 할 것이 음식만이 아니다.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삼키고 있는 지도 톺아보아야 할 주제이지만, 그것보다 제 속에 든 것을 ‘배설-적’으로 내놓았다는 것은 자기 조절과 배치의 실패라는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구강은 제1의 소화기관이다. 다작(多嚼)이라고 하였던가. 꼭꼭 씹어 잘게 만드는 행위로부터 소화가 시작된다. 애초 이 노동에 태만함으로, 몸의 임계에 이르러 실패를 예비하였음을 지적하고 싶다.
배설-적이든 어떻든 간에 밖으로 표출하는 것 자체가 정화의 조건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변증법적 주체화 과정에서는 배설-적 표현 형식이 자신의 정신적 가능성을 물화(物化) 시키는 태도가 될 수도 있다. 자기에게 지는 자리, 말이다. 그런 사태를 왜 자초하는 것일까. 별스러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련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그렇게 해도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다소 모질게 말하자면 그(녀)는 그렇게 상대해도 되는 존재로 타자를, 그렇게 해도 되는 존재로 자신을, ‘상상적’으로 표상하는 것이다. 이 정신 상태(mentalité)는 『차마, 깨칠 뻔하였다』에서 ‘비현실적 자기 표상’(246)으로 분석된 적이 있다. 주관적 보상 욕망에 사로잡힌 그(녀)는 자신을 돌봄을 ‘받아야’ 하는 아이로, 타자는 그것을 ‘줘야 하는’ 대상으로 혼동하며 타자성의 현실을 밀어낸다.
급하다고 해서, 마렵다고 해서, 소화가 안 된다고 해서, 타자에게 어떤 역할(해우소이거나 양육자이거나)을 강요할 수 있을까. 당연한 듯 받아야 할 내 몫이란 게 있을까. 없다고 하는 편이 낫다. 아니, 그런 것은 없다. 도처의 무(無)를 직면할 수 없는 자기 오해가 깊을 뿐이다. 제 속에 든 것을 배설-적으로 표출하였을 때 존재는 상하고 상처받는다. 이 기억을 몸의 가시처럼 지니면서, 자신에 대하여 삼갈(敬) 수 있어야 한다. 공부하는 자, 유아적 소망-환상에 묶일 수 없는 '정신'이 그 나아감을 선도하도록.
1428자/ 공백 제외1090
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