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DSL. 2024.06.22
나의 엄마
눈이 조용히 내리는 아침이면 엄마가 보고 싶다. 늦잠을 자고 거실에 나오니 엄마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따 영나마 눈와야. 이 놈이 작년에 온 놈인지, 올해 새로 온 놈인지 몰라도 눈 온다이.”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기억 속의 엄마는 늘 부엌을 배경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손에는 빨간색 플라스틱 바가지나, 짝이 안 맞는 젓가락을 들고서. 엄마가 부엌이 아닌 눈이 내리는 창문을 배경으로 정지화면처럼 멈춰있는 이 장면을 나는 좋아한다. 아마도 엄마가 암 수술을 받고, 5년 후 완치 판정을 받았던 해 언저리이지 않을까 싶다.
엄마의 밥상은 소박했다. 빡빡한 살림에 찬으로는 나물과 두부를 넣은 국이 자주 올라왔다. 허리띠를 꽉 쪼이는 옷을 즐겨 입고, 최 헌의 앵두를 멋들어지게 부르던 이모는 나라의 빚이 한 사람의 운명으로 돌아오던 해, 거의 정신을 놓고 엄마의 밥상에 앉았다. 영화 카사블랑카의 여주인공처럼 예쁘고, 선한 눈을 가진 큰언니도 형부와의 불화를 짊어지고, 다시 엄마의 국을 마주했다. 예민하고, 팔 다리가 가늘었던 둘째 언니는 음식을 삼킬 수 없는 채로 엄마의 밥상을 바라 보았다. 서로 고개를 숙이고 밥상을 마주했을 때, 엄마는 “서울살이가 징그럽게 되야(고되다). 어서 먹어라이”를 혼잣말처럼 했다. 소리 없이 밥을 삼키던 언니들도, 이모도, 그리고 엄마도 서로를 위해 감췄던 서러움으로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밥상을 오가는 말들은 많지 않았고, 셋은 서울로 다시 돌아갔다.
엄마’하고 불러 볼 줄만 알았지, 엄마로 불리는 일이 얼마나 막막하고 힘들지 몰랐다. 마음만 앞서고 후회만 남는 날들이 쌓이고 쌓일 때면 엄마 생각이 났다. 사는 것이 퍽퍽허먼 다 내불고 목욕탕에 댕겨 오면 쪼깨 살아진다고, 뜨끈한 보리차를 끓여 마시면 뒤집어진 속도 좀 가라 앉는다고. 고여 있는 말들을 뱉지 못하고, 전화기만 붙잡고 있을 때면 엄마가 해 줬던 말들이다. 그 사소한 보살핌의 말들이 나를 살게 했다는 걸 안다. 사철가를 들으며 아득해져가는 엄마의 눈가를 언제까지 볼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짐작보다 시간이 더 빠르게 가버리더라도 섭섭해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