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규정, 억압하는 체제의 말도 그런 것에 속한다. 불편하다는 신호로서의 계속 생각남. 정체성이란 것을 그래서 묻게 되었다. 재바른 체제의 언어와 다르게 내 말이 늦되고 뭉툭하니 우선 불편함을 단서삼아 물었다. 물고 늘어졌다. 이 불쾌는 무엇이며 불편해하는 나는 누구인가, 내것이라는 억압과 요구에 동의하는가 등의. 체제가 대하듯이 스스로를 그렇게 대할 수 없다는 몸부림이었을까. 때때로 자신을 잃게 하고 그래서 잃지않고 말하는 법을 배우게 했던 몸부림의 말로써, ‘나는 누구인가?’. ‘내가 있다’는 자기 확인의 말이기도 했다.
속속에서 배운 교재중 [로티]에 조지 허버트 미드를 인용한 문구가 나오는데 "나 자신의 자의식 속에서 곧바로 자기 고유의 것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이는 자아를 나 자신의 힘으로부터 얻을수는 없다. 그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이 자아는 오히려 간주관적 핵의 성격을 가진다. " 고 써있다. 현대철학이 ‘진리는 하나’에서 나와, 진리가 없거나 변하거나 여러 개이거나 혹은 이동한다는 설명처럼, 자아도 꼭 그러한 것 같다. 그래서일까? 고정된 자아가 없으니 ‘나는 누구인가?’를 이전처럼 물을 수 없었다. ‘내가 있다’는 ‘자기 확인’으로 기능한 질문은 엄밀히 말해 문(門)이 될 수 없다. 주로 경계를 침범당하거나 경합하는 관계에서 말해진터, 그 용법도 제한되었다. 아니 그보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으니 더욱 싱거워지는 면도 있었다. (기대와 달리 서로가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 혹은 진실!)
‘나는 누구인가’, 이 오래된 질문을 자기 확인의 말로 사용함으로써 자연처럼 여겼던 어떤 세계와 경합하고 허물게 된 가상(schein)이 있지만, 고정된 자아란 없고 ‘생성되어 가는 존재’를 받아들인 언제부턴가 ‘나는 누구인가?’란 말의 쓰임도 변하고 있었다.
고정된 자아란 없다. 이 사실로부터 온 해방과 책임은 있다. 장숙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되어’감으로써 알아가는 공부를 하고 있다. 체제와 언어에 구금된 인간, 따라하는(모방) 인간을 배웠고 수행적 재구성으로 형성되어가는 ‘주체’를 또한 배웠다. 내가 ‘누구’인지는 ‘어떤 생활양식을 갖고 있는가'를 묻는 말이기도 하다. 되어가는 존재는 결코 자신이 누구라고 직입해 말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구(孰)를 묻는 장소. (영원한)자기 소개가 있는 장소. 그러고보니 이곳에선 자신을 내세우는 (자기 확인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 말할라치면 서로 웃고말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생활양식으로, 장소로, 四隣과의 관계를 통해 서로가 누구인지, 누가 될 수 있는지를 관심하고 바라보며 돕는 연극을 수행한다.
'내가 누구인지' 더이상 예전에 묻던 방식으로 묻지 않는다. 四隣은 내가 누구(孰)라고 말할까. 그 진실을 들을 수 있을까. 내 인끔에 담길 수 없는 말(앎)은 오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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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藏孰은 알다시피 '누구를 숨겼나?'라는 뜻으로, 어떤 사람들의 장소를 말합니다. 그 학인들을 '누구?' 즉 孰人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러므로 <장숙>과 숙인은 의문형의 志向 속에서 늘/이미 생성 중인 존재입니다. 변하지 않는다면, 누구인지, 어디인지를 물을 필요조차 없기 때문이지요. 藏孰은, 어떤 사람들이 어떤 장소를 만들어가고 있는가를 묻는 의문형의 길입니다. <속속>의 공부가 늘 시(詩)를 놓지 않는 이유도 이 길 속에 있습니다.” (50회 속속 k님 축사 중에서)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