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이다. 3년 전쯤부터 몇 개월마다 치과에 오다가 이번에 거의 일 년이 넘어 내원한 중년의 여성이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 분에게 치과를 소개한 남편의 안부를 여쭈니 지난 겨울, 혈액암으로 짧은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며 눈물을 보이셨다. 그 남편분의 챠트를 찾아 보니 여러 장이 포개져서 꽤 도톰했다. 2004년, 근처 직장에 다닐 때 처음 내원한 기록으로 시작되어 꾸준히 오시다 은퇴 후에도 주기적으로 계속 내원했고 나중엔 그의 부인과 아들까지 소개시켜 주셨다. 그런데 나는 그의 이름과 얼굴은 분명히 알고 있지만 왠지 '그'라는 사람의 기억이 특별한 게 없고 어렴풋하기만 했다. 치료 기록이 마치 그의 삶의 일부인 것 같아 애도하듯 천천히 살펴보니 흐릿하던 그의 모습 전체가 점점 또렷이 다가왔다. 늘 깔끔하고 단정한 옷 매무새에 말투는 조금 느리고 차분했고, 눈빛과 태도가 모두 부드럽고 완만했다. 약속시간도 잘 지키고 불평도 크게 안했으며 한번 설명하면 주의깊게 들었고 구강관리를 가르쳐 드린대로 아주 잘 하여 나중엔 거의 최소 유지치료만으로 충분한 상태가 되었다.
한마디로 그는 내게 너무 ' 편한 환자'였다. 그래서 따로 신경을 쓸 필요가 없으니 그렇게 오래 치과에 다녔음에도 기억마저 흐릿했던 것이다. 나는 늘 힘들고 화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치료가 끝나도 오래도록 생각하면서 그 괴로움을 되새기며 분투를 다짐하곤 해왔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큰소리로 주장하지 않으면서 배려하는사람들에 대해서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다시 생각하지도 별로 감사해하지도 않으며 지내왔던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맑은 눈으로 살피면 어디에나 있다. 과장과 현학과 설된 주장의 높은 목소리들 속에서 조용히 배려하므로 우리는 잘 알아차리지도 주목하지도 못할 뿐이다. 그런 이들은 오직 부재함으로써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영혼이 있다면 내가 그를 큰 감사함으로 오래 기억할 것이라는 것으로 조금 위로를 받았으면 한다.
해완, 밖에는 아침 일찍부터 공사를 하는지 분주한 소리가 들립니다.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인디언들은 사람을 사귈 때 말없이 긴 시간을 보낸다고 하는데, 말없는 시간을 참아내기 어려운 우리네
정서로는 서투르게라도 말을 이어가는 것이 예라고 생각해 어우러지지 못한 채 미끄러지는 말들을
쏟아내고 말았다는 류시화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해완의 그 손님을 떠올리며, 오늘은 옳고 그른 것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좀 감은 채 지내보아야 겠어요.
좋은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