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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jpg



인문학, 어떤 면에서, 인간의 능력을 끝까지 믿(어주)는 실천이다. 유전자나 밈의 숙주이거나 체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인간의 무력함을 인정하여도, 작은 실천의 가치에 소홀하지 않는다. 수(數)의 과학이 상위 정보와 권력이 된 세상이지만, 시(詩)의 인문학은 이런 수행적 실천으로 그 오래된 가치를 증명한다. 그런데 관건은, 그럼에도 결코 사람중심에 두지 않는다는 것. 이 세계의 주체들은 중심을 비워, 둔다. 빈 중심을 견디어 비켜설 뿐 아니라 중심을 우회하고 이동하여 四隣(사물, 동/식물, 사람, (귀)신)에게 향하고 ()산물로서 자신에게 도달한다.

최소 세 번, 孰人이 진행하는 팟캐스트(‘공부하자’)를 반복해서 들으시는 선생님에게서 말과 글에 대한 관심이 곧 사람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이동하는 주체와 지형에 대한 마땅한 응대이지만, 그 의()에 대한 경험이 적은 탓일까, 관계의 주체로 나서지 못한 채 하릴없이 바쁘다. 사람을 잘 대한다는 것은 절대 마음혹은 정서만의 일이 될 수 없다. 거기에는 늘 구체적이고 책임 있는 노동이 따른다.

지난 글에서 듣지 않고 말하는내 태도를 지목했었는데, 이것을 인문학적 감수성의 결여라고도 할 수 있을까. 인식과 정서의 노동, ‘듣기의 노동을 교환해버리는 그러한 내면에, 차마 어떤 감수성이 생성될 수는 없을 것이다

결여의 자리에서 어김없이 어기는 것은 일의 순서, 절차였다.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을 아는 것이 도에 가깝다고 하였는데(知所先後則近道矣) 인문의 응대도 순서를 아는 것과 절차를 지키는 것이 (지키기 어려운)기본인 듯하다. ()라는 형식이 오래 사귀는 관계를 보호하는 것처럼, 일의 순서를 알고 지키는 것은 일하는 사람을 보호한다.

한 숙인이 책방을 이전(移轉)했다. 그 숙인에게 연락해서 방문 가능한 요일과 시간대를 묻고, 근처에 살고 있는 다른 숙인들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신청을 받아 함께 방문할 날짜와 시간 약속을 잡았다. 방문 선물로 무엇이 좋을지,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좋을지 함께 하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하다가 방문하기로 한 이들에게 문자로 의견을 물었다. 받은 의견을 종합하는 과정이었다. 아직 모두에게 의견이 오지 않은 상태였는데, 책방 주인인 숙인과 통화가 된 김에, 하나의 의견으로 방문 선물을 진척, 마무리시킨 것이다. 전화를 끊자마자 차례로 방문 선물에 대한 고민 어린 의견이 왔고, 그제서야 일의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의견을 물었고, 의견을 취합해 양해를 구하고 하나로 정해가는 과정(노동)을 생략했다. 왜 지켜야 할 순서와 절차를 보지 않았을까, 인간이 곧 언어라고 한다면, 말과 함께 오는 사람을 왜 섬세히 살피지 않은 것일까. 순서와 절차를 지키는 것에도 아무렴 자기 깜냥이 개입한다. 애초 방문 약속을 잡는 과정에서 누락된 분도 있었으니, ‘실수가 아니라는 프로이트의 말이 귓전에 쩌렁쩌렁하다.

결코 직입하여 대상을 만날 수 없는 인간 조건에서 마음에 동조하는 것보다 사회적 약자의 말을 배운다가 실속이었던 것처럼사물(一隣)을 잘 대하는 것과 함께, 일()의 순서와 절차를 사유하고 지키는 것이,  사람을 잘 대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개'혹은 '절차'를 지킨다는 건, 중심을 비워두고 우회하여 타자로 향하는 인간만의 실천인 것 같다. 

이러나저러나 실무의 일을 하며 내가 얻은 앎은 죄다 내 이웃(四隣), 동학을 딛고 있다. ‘순서절차에 대한 이해도, 사적 정서와 고만한 깜냥으로 이웃을 소외시킨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있음으로 피곤해지고 소외되는 이들이 많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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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의 전면성과 개인의 일면성 사이를 가로지르며, 시속의 도처에 맺힌 증상들에 대한 지속적인 집중으로써 이들과 일체화하는 균제적 감성을 얻는 일은 어울림의 지혜이며 그 성취다. (<집중과 영혼>,861쪽)

(...)그가 공동체의 동무로서 무엇보다 '어울림의 공부'를 의욕하는 자라면, 그는 차분한 집중의 이력을 키울 것이며, 이로써 '비평의 숲'을 바탕 삼아 키우는 상호작용의 감성을 자신의 몸에 새겨넣을 수 있을 것이다.(<집중과 영혼>, 862쪽)


'여자의 말을 배운다.' 사회적 약자의 '말'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 '마음'에 동조하려는 노력은 대체로 어리석고, 상상적 시혜는 현실적 진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언술적-상직적 차원의 교호적 되먹임이야말로 서로가 서로를 배우고, 새로운 실천의 디딤돌을 얻어낸다. (해방촌 장숙 개숙일, 선생님 강의원고 中)


자신의 일상이 존재의 깊고 복잡한 연쇄 속에서 대체 무슨 짓을 범하고 있는지, 무슨 덕을 짓고 있는지를 깨단해야만 한다. '알아챔'의 노동은... 자신의 생각만을 향할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생각보다 빠르게 이웃과 사물을 향해 이미/늘 개입하고 있는 자신의 존재를 향해야 한다. (선생님 글)






*희명자 연재 약속*

공부의 정밀함은 글로 이루어진다고 배웠고, 정밀하지 못한 제 사유(없음)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글은 무엇보다 실천'이라고 하였는데, 글쓰기에 관한한 혼자만의 실천은 쉬 무너지곤 합니다. 그리하여, 선생님과 숙인의 권고에 힘입어, 73회 속속 자기소개 시간에, 장숙 홈페이지 '살다, 쓰다'에 6개월간 글쓰기를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연재 제목을 '行知'로 하여, 2주마다 속속 가기 전에 글을 올린다, 를 지키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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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린 2020.04.24 20:41
    희명자의 글을 읽고 저도 이어서 아래와 같은 단상을 하게 됩니다.

    [행위/일]은 결코 독립할 수 없다.
    독립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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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도물시 2020.04.30 15:42
    선생님의 어려운 개념을 일상속에 꼼꼼히 소화시키는 희명자님의 공부는 많은 도움이 됩니다. 한사람이 꽃피면 주변도 자연히 꽃이 만발하는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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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명자 2020.04.30 23:26

    앞서거니 뒤서거니, 꽃을 피워주시는 동학을 통해 저야말로 도움을 받고있는데 말이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큰 격려가 되어요. 그리고 휴학중인 영도를 책마치에서 뵐 수 있다니, 벌써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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