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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저도 알고 싶었어요.

저는 알면 알수록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몰라서 하는 실수들, 몰라서 지나치는 것들, 뒤늦은 후회들, 때늦은 깨달음에 비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는 일에 열심을 부렸어요. 호기심이나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책을 찾았어요. 어디에 해답이 있을지 몰라 이 책, 저 책, 책을 찾아 헤맸던 시간을 보냈어요.

   


언니

저는 무엇을, 왜 그렇게 알고자 했을까요? 이제와 생각해보니 제가 알고 싶었던 건 확실한 지식이었어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끼는 막막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실마리가 바로 확실한 지식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아이들이 쌍둥이니 한 번 실수가 두 명의 아이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에 더욱 실수를 줄이기 위해 많이 알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특히 발달에 대한 염려가 많아 월령이나 연령에 맞는 표준 발달 지표들을 잘 따라하고 있는지, 혹시 따라하지 못하는 발달은 시간이 지나면 따라 할 수 있는 건지, 따로 교정이나 치료가 필요한 것인지 스스로 판단하려고 했어요



 또 저는 먼저 아이들을 키운 친구들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경청했어요. 경험만큼 확실한 지식의 연원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데 친구들의 이야기는 저를 혼란스럽게 했어요. 친구들의 경험은 저에게 확실한 지식바깥에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거에요. 제 친구 S는 현미가 흰쌀보다 영양이 풍부하다는 지식을 가지고 굳이 굳이 힘들게 현미 죽을 끓여서 먹였데요. 현미는 잘 퍼지지도 않아서 죽을 끓이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들었다고 해요. 그런데다 먹는 아이도 현미로 만든 거칠거칠한 죽이 맛이 없어서 먹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더라는거에요. 그러면서 저에게 하는 말이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그냥 몸에 좋든 말든 흰 쌀을 푹 끓여서 참기름도 넣고 간장도 살짝 얹어서 맛있게 먹게 해주겠다는 거에요. 또 다른 친구 L은 말하길, 잡곡이 영양이 더 풍부하다는 상식에 따라 아이 몸에 좋으라고 열심히 잡곡밥을 해서 먹였데요. 근데 아이가 10살도 되기 전에 시력이 안 좋아져서 안경을 쓰게 됐다는거에요. 친구 입장에서는 공들여 키운 아이가 일찍 안경을 쓰게 된 것도 속상한데 거기에 덧붙인 의사 말이 더 속상했다는 거에요. 바로 소화도 안되는 애한테 잡곡을 먹여서 눈으로 영양이 안가서 그렇다는 말이었어요. 그러면서 내가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흰 쌀밥을 맛있게 해주겠다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언니 

어쩌면 저를 혼란스럽게 한 이런 얘기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서' 생긴 일 일 수도 있어요. 현미나 잡곡이 흰쌀에 비해 식이섬유나 영양이 풍부하다는 것만 알았지 소화력이 약한 아이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영양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소화는 놓쳐버린 단순한 실수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언니, 저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제가 아이를 키우면서 과연 내가 믿고 있는  확실한 지식이 실수를 줄일 수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교훈삼아 놓치는 지식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최선을 다하면 다할수록 점점 어긋나는 이상한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었던 거에요

 

  


언니,

제가 알고 싶었던 건, 확실한 지식을 누가 보증할 것인가? 라거나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라는 철학적인 문제들이 아니었어요. 저는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천적인 앎을 원했는데 다만 저는 앎을 그 자체로 고정적인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알기만 하면 어떻게든 적용될 것이라고요.   



그때의 저는, 사람의 앎이라는 것이 된장 속의 풋고추처럼 얌전히 박혀 있지 않고, 시절과 함께, 관계와 더불어 그리고 (파스칼의 재미있는 말처럼) ‘자오선의 변화에 따라바뀌는1)것 인줄 미쳐 모른채, 또 이런 어긋남이 개인의 실착이기 이전에 세속의 구조2)라는 사실, 역시도 꿈에도 모른 채, 어긋남에 실망하며 자책하고 상처받는 시간을 보냈답니다. 


  언니, 또 편지할게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집중과영혼p. 703

2) 세속의 어긋남과 어긋냄의 인문학p.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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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우젠 2020.06.16 15:42
    삶에서 치뤄야 하는 통과의례를 이제는 잘 치룰 수 있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무언가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또 시간이 흘러 만나게 된 새로운 앎 앞에서 다시 아직도 멀었구나, 예전에 확신했던 자신감의 정체의 왜소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벅차게, 기쁘게 무너지고, 조용히 다시 무너진 탑을 쌓는 인간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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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명자 2020.06.25 10:28

    연니자, 제 큰아이는 늦된 아이에 속했답니다. 그래서 더욱 첫 아이에게 전이된 '불안'이 있었어요. 각기 다른 전문가의 말이나 육아서는 혼란스러웠고, 제  상황에 곧바로 대입할 수 없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았어요. 제 상황에 맞게 변용하거나 번역할 수 있는 주체화에 나서지 못한 채, 어쩌면, 밖에서 확실한 것을 찾아 의지/의존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기대와 의도가 어긋날 대로 어긋난 후에야, 보다 근원적인 탐색에 나섰던게 아닐까...... 연니자의 글을 읽으며 제게도 그런 어긋남이 알게 모르게 상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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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泥子 2020.06.27 00:00
    그랬군요.  희명자도 기대와 의도가 어긋날 때로 어긋난 후에야 근원적인 탐색에 나서게 되었군요. 이후 희명자의 탐색의 과정들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도 무척 궁금합니다.
    저나 희명자나 첫 아이 키우기라는 힘들고 고독한 과제를 통과하면서 만난 어긋남들이 그때에는 비록 상처였지만, 뒤돌아보니 공부의 자양분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로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