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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1)

사창(紗窓)에 기대 앉아 수놓기도 느리구나,

활짝 핀 꽃떨기에 꾀꼴새는 지저귀고,

살랑이는 봄바람을 부질없이 원망하며,

가만히 바늘 멈추고 생각에 잠겨 있네.

 

저기 가는 저 총각은 누구 집 도련님고,

푸른 깃 넓은 띠가 버들 새로 비쳐 오네.

이 몸이 화신하여 대청 안의 제비 되면,

죽림을 사뿐 걸어 담장 위를 넘어가리

 

김시습이 지은 이생규장전은 시로 쓴 소설이다. 중국 영화 천녀유혼을 떠올리게 하는데 당시 죽은 자와 사랑을 나누는 명혼소설이란 장르는 중국과 조선에서 인기가 높았던가 싶다. 우리나라 영화감독들은 구운몽이나 최치원전같은 고전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좋을텐데 그 많은 제작비를 들여 좀비를 만들고 고층건물을 부시는데 쓰나 싶다. 이건 내 사정. 더 말하면 나만 좀비스러워 질 뿐.

우야둥둥, 이생규장전은 A4 8매 정도 되는 고전소설인데 소설의 반 이상이 시로 이루어져 있다. 최랑은 그녀의 집을 낀 고샅길로 국학에 오고가던 귀남자 이생에게 반해 수 놓던 손을 쉬인 채 홀로 시를 읊는다. 이생이 그 시를 읽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화답시를 지어 담장으로 던지는데,

 

무산(巫山) 열두 봉에 첩첩이 싸인 안개,

반쯤 들난 봉우리는 붉고도 푸르러라.

이 몸의 외론 꿈 수고롭게 하지 마오,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양대(陽臺)에서 만나 보세.

 

사마상여(司馬相如) 본받아서 탁문군 꾀어 내려니,

마음 속 품은 생각 벌써 흠뻑 깊어지네.

담머리에 피어 있는 요염한 저 도리(桃李),

바람에 흩어지며 고운 봄을 앗아가네.

 

예쁜 인연 되려는지 궂은 인연 되려는지,

부질없는 이내 시름 하루가 삼추 같네.

넘겨보낸 시 한 수에 가약 이미 맺었나니,

남교(藍橋) 어느 날에 고운 님 만나질까.

 

이렇게 두 사람은 시를 주고 받으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남자인 이생은 여식인 최랑과는 달리 부모의 꾸지람을 들을까 근심하고, 최랑이 죽을동말동 하며 어렵싸리 얻어낸 부모의 허락으로 혼례를 치룬 뒤 난이 일어났을 때도 홀로 도망가 최랑을 구천의 혼이 되게 만든다.

사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작아지고 있는 학생들의 이다. 남학생들의 손은 고와지고 있고, 여학생들의 손은 작아지고 있다. 물론 대한민국 다수의 중고등학생들의 손을 관찰하거나 통계를 내어 본 것은 아니기에 확언할 수는 없고, 2년 정도 아이들의 손을 보며 든 상념일 뿐임을 밝혀둔다.

학생들과 이 소설을 읽으며 이 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나으면 그 아이들은 아마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른 채로 살아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생을 만나지 못하자 최랑이 상사병으로 몸저 누워 생사를 오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학생들은 최랑의 상사병에 공감을 하지 못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눈치가 아니라 당연한 것. 이생규장전에 나오는 시의 효과 다섯 가지를 전하고 암기시켜야 나로써는 아이들에게 최랑의 상사병이 가슴에 대못이 한 개 박히거나, 작은 압정 대 여섯 개를 꾹꾹 누르는 물리적 통증이라고, 나무위키에 소개된 상사병의 일곱 번째 증상으로 주체할 수 없는 망상과 그 부산물로 나오는 108번뇌가 있다는 것을, 상사병과 죽음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본문을 해석하고, 문제풀이로 전진한 뒤, 오답으로 뒷정리를 하고 다음 교시를 기약해야 하는 나로써는 난공불락인 것이다.

 

(2)

다녀오겠습니다.”

앞집 소녀가 할머니에게 외출 인사를 한다. 할머니, 사글사글 비밀스러운 목소리로 불러세운다. 할머니가 열고자 하는 세계 앞에서 소녀는 고요해진다. 할머니가 부르는 곳으로 갈지, 친구가 있는 곳으로 갈지 망설인다.

누구한테 뺏기지 말라, 누구한테 주지도 말고, 맛난 것, 먹고 자픈 것, 햄버거를 사먹거니라. 소녀는 할머니의 자분자분한 목소리에 이끌려 저쪽 세계로 기투企投 한다. 할머니의 손에서 소녀의 손으로 천원 짜리 몇 장이 건너갔을 것이다. 목소리는 소녀를 불러 잠시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 머물게 하고, 그곳에 손과 손에 얹혀 이동한 무엇이 있다. 그 무엇으로 소녀의 시간은 멈춘다.

언젠가 홀로, 문득,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는 순간일까, 등교를 하다가 하룻동안 팔 물건을 정리하는 동네 가게 주인의 어깨를 훔쳐 본 순간일까. 세상 모든 것들과 이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온 소녀가 제일 먼저 버린 것은 무엇일까.

아이들과 <이생규장전>을 읽으며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할머니에게 용돈을 받으며 지은 표정일 것이다. 손에서 손으로 몇 천원이 쥐어졌을 때 소녀의 표정. 체념이 싹트기 전 소녀가 살았던 세계의 얼굴들.

 

손은 작아지고 있다. 컴퓨터와 휴대폰을 쓰기 전 을 상상해 본다. 한국의 글자 ‘o’이 예뻐서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십 년을 넘게 한국에 살고 있다는 외국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외국인이 본 ‘o’은 누군가의 손으로 그린 동그라미가 아니였을까.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고통을 이해할 필요가 없듯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상사병으로 사람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단지 한 사람의 세계를 바꿔 놓은 을 생각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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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명자 2020.05.21 06:52

    기술문명이 물리적 거리감을 좁히고 장소를 균질화시킨 이래 상사병은 소멸된 듯하지만, 상사병을 잃은 죄(?)로 생겨난 병도 많겠어요. 그제는 우연히 이소라의 '봄'이라는 노래를 들었답니다. '요즘의 사람들은 기다림을 모르는지 미련도 없이 너무 쉽게 쉽게 헤어집니다' 라는 노랫말이 있었어요.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때문에 병을 얻고, 사람에게서 길도 얻는 건 많이 다르지 않겠지요.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장숙에서는 토우젠이 말하지)

    *이소라 '봄' https://www.youtube.com/watch?v=lldbjTRpZtg&pbjreload=10

  • ?
    토우젠 2020.05.21 12:03
    ‘그 한 사람’을 향해 땅으로, 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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