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을 하지 말고 대화를 해보라”는 말을 들었다. 내 말 뒤에, 말이 끊기는 ‘반복되는 상황’도 어떤 실마리가 되었다.
니체는 종교는 ‘대화’를 막는다고 했다. 내게도 적용되는 비판이다. 20대 후반까지, 종교 밖에서 사람을 사귀어보지 못했던 나는, ‘대화’가 무엇인지 묻지 않고 다만 ‘말씀’이 특권화 된 세상에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공부’라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며 얻게 된 소득 중의 하나가, 다름 아닌 내 꼴, 대화할 줄 모르는 내 꼴을 알게 된 것이다. 상대의 질문에 조급한 반응이 튀어나오고 정해진 답이 있는 냥, 아는 것(모르는 것)을 너무 빠르게 말한다. 결코 충분히 응할 수 없는 상태로 퇴행하는 ‘증상처럼 구조화된 자아’를 보게 된 것이다.
정답 없는 세계, 우연성과 모호함, 미로와 심연이라는 실존에 개입하는 내 정서는 무엇이었을까, ‘답’에 익숙하도록 구조화된 자아는 어떤 역사(상처)와 문화의 산물일까, 나는 왜 ‘답하기’라는 얕은 쾌락에 안주한 것일까, 한편, ‘듣기의 수행’은 어떤 길을 내는 걸까,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다. 하고 싶은 말을 멈추지 못하는 곳에서(知止不殆), 말과 몸의 어긋남이 분명해지는데, 말을 하고 있지만, 내 말도, 네 말도 듣지 못한다. (말과 말, 몸과 몸, 말과 몸의 분열은 공부의 중요한 물음이다) 자신의 말을 회의 없이, 의심 없이, 매개 없이 그래서 듣기 없이 말하기 시작하는 곳에서 몸은 이미 소외되고 또 다른 소외의 연쇄를 짓는다.
에고가 번성하는 곳, 자아와 증상이 합체되어 공고화 된 곳에 ‘듣기’란 없다. 반대로, ‘듣기’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에고는 차마 번성하지 못할 뿐더러 연성화 되는 것도 같다. 작은 촛불 하나가 어둠을 몰아내듯이, 에고와 싸워 이기고 증상을 없앤 후(後)라야 대화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즉, 순차적인 일이 아니라 동시적인 사건처럼. 촛불하나를 켬과 동시에 어둠이 물러나듯이. 새겨듣고, 버텨듣고, 연극적 실천으로 듣고, 몸을 끄을-고 듣고, 듣다가 죽는, ‘듣기’는, 대화의 시작(始作)이고 ‘에고가 수문장을 자처하는 방’에서 방도 모르게 창을 내어 어떤 한 인간을 다른 방(場)으로 ‘이동’시킨다.
듣지 않고 급하게 답하는 자리에서, 듣는 법, 듣고 상대의 말을 따라가 말하는 법, 그리고 대화하는 법을 다시 배우고자 한다. ‘답하기’라는 얕은 쾌락은 풀어주자. ‘듣다가 죽는다’의 결기는 챙기고, 실패의 자리에서는 회피하듯 너무 빨리 빠져나가지 말자. 하물며 ‘해야 할 말’도 다 말하지 않는 것이 사람을 대하는 예(禮)라고 배웠는데, 하고 싶은 말을 하고야마는(아는 것을 다 말하는) 볼품없는 자리가 내가 선 자리(小人之學入乎耳出乎口)이고, 이동해서 나가야 할 자리임을 다시 한 번,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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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기울임은 인식의 욕망 이전에 이미 작동하는 관계와 태도의 변혁을 말한다. (<집중과 영혼>,277쪽)
‘인문학 공부’는 말, 그것도 혼잣말이 아니라 더불어 하는 말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고, 또 이 관심이 이미 대화적 관계 속에 내재한 수행적 어긋남에 민감하게 응하면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이기에, 지근지처의 낮은 공부란 다름 아닌 듣기-말하기의 지속적인 갱신이며, 집중과 3도 이 갱신의 행위와 겹친다. (<집중과 영혼>, 278쪽)
자신의 말은 입술의 현장을 통해 난반사하며 자신을 폭로한다. (<차마, 깨칠 뻔하였다>, 53쪽)
김태준 지음 <홍대용>, 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