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 신화는 아직도 진행 중? : 내가 목격한 한국사회의 능력주의
한때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헬조선’, ‘노오력’, ‘수저계급론’ 등의 말들이 유행했었다. 노력만으로 사회적 지위 상승을 꿈꾸기 어려운 사회현실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말들이다. 개인이 어떤 분야에서 노력을 하면 실력을 키울 수 있고, 그 실력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아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였다면 그런 자조 섞인 유행어들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대 이후,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수단으로 여겨졌고, 나름 이상적인 사회시스템으로 신봉되어왔던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사람들이 조금씩 회의하기 시작하는 것 같아 내심 반가웠다.
하지만 며칠 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우연히 확인한 베스트셀러 도서 순위목록에서 여전히 우리사회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1위부터 5위까지의 책들의 분야는 이른바 “자기계발”이었고, 주제는 거의 전부 돈이었다. 각각의 책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제목 자체에서 노골적인 메시지를 풍기고 있었다. (1.존리의 부자되기 습관, 2.부의 대이동, 3.김미경의 리부트, 4.돈의 속성, 5.더 해빙: 부와 행운을 끌어당기는 힘) 대강의 메시지는 아마 “열심히 노력하면 여러분도 부자 될 수 있다”일 것이다. 개인의 노력으로 부자 되기 힘든 세상이라는 것을 자조하면서도 동시에 노력하면 부자 될 수 있다는 메시지에 현혹되고 마는 아이러니함을 마주한다.
내가 일하고 있는 학교 현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목격한다. 학생들은 한국 특유의 줄세우기식 입시위주 교육시스템 하에서 자신의 노력이 제대로 보상받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의 낮은 내신등급의 원인을 ‘노력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곤 한다. 현재 고교 내에서 시행되고 있는 소위 내신 9등급 상대평가 시스템에서는 1등급 상위 4%, 2등급 11%, 3등급 23%... 등으로 각 등급의 비율이 정해져 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전교생 중 1등급은 4% 이상 나올 수 없는 구조다. 보통 대다수의 학생들은 이 냉혹한 경쟁구조에 큰 저항 없이 순응한다. 이들은 자신이 부여받은 낮은 성적에 대해 자신이 ‘더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음을 자책한다. 그들은 ‘자기반성’이라는 내면의 의식을 치른 뒤, 곧 다가올 다음 시험을 위해 심폐소생하듯 또 한 번의 강한 학습동기를 스스로에게 강제주입한다.
이 무정한 평가시스템에 대해 불평을 하는 몇몇 ‘깨인’ 학생들이 가끔 있긴 하다. 정교한 언어로 설명하지는 못해도 현행 평가제도에 뭔가 부당한 것이 있다고 의심한다. 하지만 그들도 별수 없이 바쁘게 다음 시험을 준비해야 하기에 “쓸데없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게 된다. 대게 체제를 의심하는 소수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최상위 성적을 내는 경우는 드물다. 능력주의 사회시스템의 모순을 깨달은 개인이 그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체제 내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반면, 현행 체제가 전혀 하자 없고 공정하다고 믿는 개인은 묘하게도 그 체제의 모순과 한계로 인한 상처나 피해로부터 보호된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처음 사용한 용어로 공적, 장점, 우수성을 뜻하는 merit과 그에 의한 통치나 지배를 뜻하는 cracy가 합쳐진 말이다. 사회정치적인 맥락에서 중세의 신분제, 세습권력, 정실주의 등의 봉건적 질서가 해체되고 그 자리를 개인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실력/능력주의와 같은 근대를 규정할 수 있는 개념들이 대체하였다. 근대의 개인들은 점차 자신의 출신이나 신분 등 태생적 조건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노력을 기반으로 사회적 인정과 보상을 얻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는 분명 인류의 사회적 진보라고 불릴 수 있다.
모든 이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의 자원을 차등적으로 배분한다고 하는 능력주의는 언뜻 합리적이고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는 제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세월을 거치면서 역설적으로 계급을 고착화시키고, 사람들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로 변모한다. 과도한 경쟁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서 능력주의는 사회적으로 실패한 사람에 대해 ‘똑같은 기회를 주었는데 왜 그것밖에 못 했느냐’고 몰아세우고, 개인의 실패를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만 남겨둔다. 무력한 개인들은 그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여 자신의 실패에 대해 스스로를 책망하고, 자연스레 사회적 불평등과 “능력 차이”에 따른 차별적 보상은 정당화된다.
현대의 능력주의가 위험한 이유는 능력 차로 생긴 사회적 불평등을 내면화한 개인들이 그 체제 논리에 의해 자신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인정하는 동시에 정확히 같은 논리로 타인을 차별한다는 것이다. ‘일베’ 현상으로 대변되는 인터넷 커뮤니티 상의 온갖 혐오 발언들은 어느 정도 이러한 능력주의를 깔고 있는데, 이는 마치 19세기 말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내면세계를 잠식했던 사회진화론적 사유와 흡사하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국제사회에서 힘 있고 실력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라는 논리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당대 주류 지식인들은 실력/힘을 양성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고, 그 우승열패의 논리를 고스란히 다른 약소국들에게 적용하는 것에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부모를 원망하거나 타고난 운명 탓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능력주의 사회에서 현재 나의 가난은 내 노력/능력의 결과이다. 그래서 서양의 중세에서는 가난하고 처지가 딱한 사람이 ‘불운한(unfortunate)’ 사람이라고 묘사되었던 반면, 현대에 와서는 ‘실패자(loser)’로 불린다. 시장 내의 자유로운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능력주의는 사회적 성공에 있어서 중세시대에 통용되었던 ‘운(fortune)’의 작용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동양에서도 운칠기삼이라 하지 않았던가.) 한 개인이 사회적 성공을 이루게끔 하는 능력을 얻게 되는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 순전히 운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코 노력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어떤 지점에서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조건과 한계가 있다. 한 개인은 모든 영역에서 능력이 뛰어날 수 없고, 특정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그 능력을 계발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야 하고, 나아가 그 능력으로 성공하려면 그 능력을 인정해주는 시대적 분위기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법이다. 한때 자기계발 분야에서 유행했던 이른바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도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로만 설명될 것이 아니라 만 시간을 채울 수 있도록 기여한 환경적 요인, 개인의 타고난 유전적 기질 등 ‘운’의 영향이 크다.
이와 더불어 능력주의 허구의 단면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요인은 소위 ‘능력’이라고 불리는 자질들은 근본적으로 타인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연주 실력이 뛰어난 피아니스트도 자신의 연주를 감상하고 진가를 알아봐 줄 청중이 없다면 그 연주 능력이란 하나의 랜덤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능력은 그 능력이 발현될 대상 즉 타자를 전제하는 것이다. 사회적이지 않은 능력이란 없고, 더욱이 능력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승인을 받지 못한 능력은 보통 능력이라 불리지 않는다. 고로, 능력이 마치 타인이나 환경의 개입 없이 순수하게 개인 단독의 의지나 노력의 산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오만한 발상이다.
능력주의 논리는 분명 허점이 있고, 그 한계가 분명함에도 사람들이 그 지배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무력해지고 마는 데는 이유가 있다. 힘(능력)없는 개인이 공공연하게 그 구조와 시스템을 비판하면 루저(loser)의 푸념이나 떼쓰기로 취급당할까 두렵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인터넷에서 막 서울대에 합격한 고3 수험생의 사회비판 글이 잠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자신도 현 입시위주의 교육체제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지만 힘없는 자리에서 이를 비판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구조를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서는 사회의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서울대를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여 끝내 합격했다는 당찬 발언이었다. 어린 친구의 글이 참 대견하고 멋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사회구조를 비판하려면 적어도 서울대라고 하는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자리”가 선행되어야 하는 논리는 조금 불편했다.
능력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체제가 인정하는 ‘능력’ 있는 자리에 있어야 그나마 비판의 말을 할 ‘자격’이 주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불평쟁이나 투덜이쯤으로 비추어지기 쉽다. 이러한 현실이 능력주의 논리의 허구에 대해 ‘능력’ 없는 개인들을 침묵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에 어느 정도 만연해있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의 사고가 능력주의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과도한 입시경쟁과 서열화를 강조하는 학교 현장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스며있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로부터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자기계발’이나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착취하거나, 불평분자로 찍히지 않기 위해 능력에 따른 사회 분배시스템의 공정성을 애써 신뢰해보려는 자기기만의 길을 택하기 쉽다. ‘노력하면 뭐든지 가능하다’고 설파하는 과잉된 긍정주의 메시지에 현혹되지 않으면서도, 노력해도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 무력하게 냉소하지도 않는 그 사잇길을 내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