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성과 거짓말
(부제 : ‘자기의식이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 정신의 형식으로서의 거짓말하지 않기)
별강자 : 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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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言語이 사람 사이에서 흐르는 것이라면 거짓‘말’이 있는 자리도 사람 사이일 것이고, "변명이 영혼을 갉아먹는 것(자본과 영혼, 71쪽)"이라면 '거짓말은 그 영혼에 균열을 내는 것' 일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거짓말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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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아이들은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한다. 이런 거짓말은 차라리 귀엽다. 그 거짓말을 잡아 어른들은 아이에게 거짓말 밖에 있는 것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거짓말에 의해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통해 아이는 배워 나간다. 사회 속에서, 그러니까 사람의 사이 속에서 거짓말 하는 제己/죄罪가 무엇인지. 반면에, 이미 사회를 알고 도덕을 아는 성인adult의 거짓말은 조금 복잡하다. 처한 상황의 복잡성과 그 상황에 연루 된 사람간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선/설 자리의 당위를 찾기 위해서 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당위는 본연히 자기당위이다. 이미 체득한 사회적 시선(도덕)과 그 안에서 웃자란 심리가 작동하며 제 존재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자기를 보(保)하는 에고 혹은 자기표상에 충실한 당위로서의 자기 당위 말이다. 다자적으로 연속되는 관계의 지형 속에서, 이는 곧, 내적 합리화의 끝없는 환원으로 빠지기 쉽다. 한 번 죽었어야 할 자기(에고)를 죽이지 못하고 살린 대가로 말이다. 자기 당위로써 자가 발전한 자기 합리는 제 안에서만의 진실일 수밖에 없는 ‘심리적 사실’을 만들어 내며 그 사실을 증거 해 줄 외부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리고 그 외부 아닌 외부를 통해 자기 진실을 증거 받는다. 동일시 혹은 리비도적 결착의 방식으로써 세상과 내통하는 것이다. 어느새 거짓말 아닌 거짓말이 자기를 옹위한다. 그 심리적 경계에 갇혀, 경계 밖으로 외출하지 못한 자아의 정서세계가 막 도덕을 배우는 아이의 시선에 머물게 되는 것은 어쩌면 타자를 만나지 못(안)해 빠지게 되는 퇴행으로서의 유치화, 그 자아의 궁극적 몰락을 예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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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합리화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타자를 수용하는 방식에 있다. 타자성이라는 그 낯섦의 수용은 ‘사회적 동화(아렌트)’ 속에서 자기를 살려야 했기에 이룬 나만의 승리로부터의 탈출이자, 자기가 얼마나 타인으로부터 타자인가를 알게 되는 과정이며, 타자와 분리하여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인정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즉 자기정당화 혹은 자기합리화로서의 거짓말에서 빠져나와 외부적 진실 혹은 사실들이 자기 몸을 치는 것을 허용 하여,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존재를 만나고 시류時流적이고 지엽적인 도덕의 흐름에 빠진 자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윤리에 기반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타 인정自他認定을 통한 세계 확장 혹은 자기 도량을 넓히는 재구조화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목전의 상황을 파악하고 대면한 타자를 감각하여 소통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자/타를 모두 살리는 진실 혹은 (미래적)사실을 말 할 수 있는가의 (응하기)실력’의 문제가 되기도 한다. 에고라는 폐쇄구조 속 자아가 선택하는 답지는 자기 정합성을 찾아 자기를 보保하는 데 여념이 없겠지만, 지며리 에고를 죽이는 형식 속에 자기 발을 묻은 학인學人은 ‘즉자대자존재(Au-und-Fürsich)의 종합(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 163쪽)’을 향한 방향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 이는 내용에 빠져 난반사된 이론이 누더기 거짓말이 되지 않고, 종합 된 공부로 나아가는 실력이 되는 현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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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느 장소 어디 즈음에 있든 본질은 혹은 본진은 내 생활이다. 유령처럼 혹은 헛깨비처럼 제 생활의 현장에서 부유浮游하고 있는 자신이 못마땅해 진다는 것은 오연傲然한 자기에게서 걸어 나와 타자를 만나러 가는 첫 발을 뗄 때가 찾아왔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리고 생활이라는 연극적 현장에서의 충실성, 그것이 다만 타인에게 혹은 그 상황에 맞게 자기를 얼마나 잘 꾸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장소 그 시간에 얼마나 연극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의 문제라면, 학인은 연극적 생활인일 것이고, 그의 생활은 어느 시공의 무대가 되어 낮게 빛을 발할 것이다. 그 빛 속에서 ‘자기의식이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 정신의 형식으로서의 거짓말하지 않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 글은, 지난 11월 5일(토) 43회 보속(서숙)에서, “참말과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실력의 문제 일 수 있다”라는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에 착안하여 정리하게 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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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식이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은,
<적은 생활 작은 철학 낮은 공부> 31쪽의 구원,
“자기의식이 자신의 삶과 실천 속에서 완전히 녹아든 게 바로 구원의 징표다. 자기를 바라보는 자기의식이 소외되거나 스스로 버성기지 않으면 그것으로 좋다”라는 문장에 터해 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