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은 사물을 벗어난다." (k 선생님)
"정신은 자란다." (k 선생님)
(정)신은 무시무시하게 공평하다. 선악도 시비도 도덕도 없기 때문이다. 정신은 자신이 개입할 수 있는 물질의 배치를 얻은 후 복제를 창발하였다. 복제된 세포는 외부 조건과 응해 생명종이라는 무수한 양태를 만들며 물질계에 정신을 '표현'(k 선생님)하는 창구로서 역할을 해왔다. 생명은 물질의 속성인 열 평형에 길항하는 질서화된 에너지 덩어리다. 생명과 생명의 만남은 에너지 덩어리 간의 만남인 셈이다. 그 세세한 방식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숲을 보게 되면 우연히 만나 서로 합(겹)치거나 갈라질 뿐이다. 그 와중에 자신의 형식을 잃은 에너지 덩어리는 열 평형 상태로 회귀한다. 생명이라는 에너지 덩어리가 서로 만나는 목적이라는 것을 부여해 보자면 복잡계를 구성함으로써 정신이 깃들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불이적 정신의 관점으로 해석한 생명의 목적 아닌 목적이다. 이런 해석에 인간이 부여한 의미는 별무소용이다. 오로지 서로간 응해서 복잡계 구성에 유리한 물질의 배치가 에너지 덩어리로서 유지된다. 포식이니, 감염이니, 면역이니, 사회성이니 다 인간의 수사일 뿐이다. 정신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표현될 창구로서 적합한 물질의 배치를 자연선택하며 나아간다.
자연선택은 정신의 것이다. 먹이 사슬이 있지만 영원한 최상위 포식자는 없다. 바이러스라는 미세한 에너지 덩어리에 의해 막강한 힘을 지닌 포식자도 자신의 형식을 잃고 분해되고 만다. 이유는 워낙 뻔하다. 바이러스와 응하는 노하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생이라 불리든, 면역이라 불리든, 이기나 이타라 부르든 응하기 능력을 갖춘 개체만이 살아남아 대를 잇게 된다. 이는 정신이 선택한 효율적 방식일 뿐인데 타자와 응하기 능력이 정신의 능력과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최종 포식자로서 여타 생명종을 드다루며 군림하고 있지만 변종 바이러스나 암세포의 등장은 인간이 추구하는 정신의 방향성이 통합의 길을 벗어나고 있음을 지표로서 드러낸다. 암을 ‘정신의 퇴화를 알리는 하나의 지표’라고 했지만 이때의 정신은 인간에 깃든 정신으로 한정된다. 암과 변종 바이러스의 출현은 인간의 문화인 발암물질, 항생제 등속과 뗄 수 없는데 아무래도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물질은 정신의 길인 통합과는 어긋난다. 불이적 정신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암과 변종 바이러스는 정신의 방향성을 잃(잊)은 인간종의 형식을 해체하려는 정신적 개입의 양태다.
여타 생물과 다르게 정신의 수동적 개입을 넘어 언어성이라는 능동적 개입의 길이 열린 인간의 몸은 복잡도의 첨단을 향해 내달리며 정신이 개입 가능한 유용한 창구로서의 맥을 이어왔다. 물질의 배치를 정신적으로 표현(표상)하는 계제를 넘어 발화라는 정신의 개입을 통해 언어성을 기반으로 물질의 배치를 정신적 차원에서 임의로 편집하며 드다룬다. 시공간의 탄생이다. 물리학에서 시간이니 공간이니 말하는 것은 말이 개입하는 정신적 차원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존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시공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물질의 외부다. 물질의 배치는 ‘지금 여기’만 있을 뿐인데 말이라는 정신의 조각이 개입함으로 인해 ‘지금 여기’의 외부가 창발되며 물질계에 초월적으로 ‘다르게’ 개입할 능동적 창구를 한계 없이 확장한다. 결국 인간의 언어가 정신을 지닌 생명을 스스로 파괴하는 길에서 변침해 정신의 통합 가능성을 향하지 않으면 정신의 개입은 인간종을 절멸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정신은 스스로 자라기 위해 통합을 벗어난 정신적 존재를 제거하려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조화와 균형과 어울림과 응하기를 생략한 물화된 말들이 인간의 말을 그득 채우면 인간의 미래도, 그렇기에 희망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