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지린
영화는 감독의 작품이므로, 감독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확장되어 나올 터인데, 감독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듯,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치밀하게 모든 것을 연결시켜놓았기 때문에, 영화를 되풀이해서 보면 가닥을 헤아릴 수 없는 연관성을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찾아낸 연관성은 의미연관성일 뿐인데,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연관성의 가닥으로부터 헤아릴 수 있는 것은 의미연관성 뿐이기 때문이다. 그 가닥들 중 하나로서, 로버트에게 말을 걸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위치를 알려주는 네 명의 여인에 대하여 정리를 해보았다. 로버트의 몸과 정신은 여인들을 만나면서 이동하고 차츰 높은 곳을 향하게 된다. 거기에 하나 더, 이 영화 속에 있으되, 인물들이 사는 세상과는 따로 있는 이야기하는 목소리의 존재다. 이 존재 또한 다른 네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로버트를 옮겨준다.
1. 글래디스 올딩
Gladys introduced herself as if women did things like that every day.
"Hello."
And maybe they did.
"Hello."
"I haven't seen you here before."
"Oh, no, I've never, um....uh..."
"First time?"
"My cousin, yeah, brought me. Well, his wife is very much....I'm...I'm Robert."
"I'm....I'm Gladys. Nice to meet you."
"Nice to meet you."
(영화에서 글래디스와 로버트가 만나는 장면의 해설과 대사, 이하 영문문장은 다 영화대사임)
글래디스와 벌목공 로버트가 처음 만났다. 글래디스가 로버트를 불렀다. "Hello." 그렇게 로버트에게 다른 사람과 세상을 향해 다리를 놓아주었다. 로버트 스스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글래디스를 잃고 나서 로버트는 아무도 없는 숲에서 Hello! 라고 불러본다. 상실의 고통을 겪는 자는 신을 향해 자신의 고통에 대한 까닭에 대해 알려주기를 고대하지만, 대답은 없다. 숲은, 신은 무의미하다.
2. 클레어
산불감시원 클레어와 로버트가 처음 만나 말을 나눈다.
"You must be Robert. Nice to meet you."
"Yeah, You too."
두 사람은 산불감시초소에 올라간다. 그 초소는 산불이 났던 곳에 세워져 있다.
로버트가 글래디스를 잃은 곳이다.
“Everything looks so small from up here."
로버트는 간신히 자신의 고통이 놓인 자리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된다.
3. 모자를 쓰고 얼굴이 희미했던 여인
그는 도시로 나와 헤맸다. 인간은 달에 착륙하고 있었다. 진열창 안에 진열된 TV에서는 이를 중계하고 있었다.
"What is that fellow doing?"
로버트가 진열창 앞에 서 있는 여인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He's in outer space."
"So is that?"
"That's us."
우리는 정말 높은 곳까지 가 닿았다고 말해주는 그 여인의 얼굴은 희미하다.
그녀는 그 옆에 서 있었다.
4. 노란색 경비행기 조종사였던 여인
로버트 뒤에 앉은 경비행기 조종사가 외친다.
"Hey, you'd better hold on something."
여성의 목소리이지만, 조종사 모자와 고글을 쓰고 있어 얼굴은 전혀 볼 수가 없다. 그녀는 로버트 뒤에 있다.
로버트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얻는다. 아주 높은 곳에서, 그의 머리가 지상을 향해 있을 때였다.
5. 말하는 목소리
로버트는 십대 초반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게다가 말수도 적다. 그는 자신의 내면과 정신을 몸으로만이 표현할 수 있을 뿐인데, 그를 대신해서 해설자가 그의 모든 것을 대신 설명해준다. 그가 세상에 어떻게 등장했고, 어떻게 사라졌는가 하는 역사적인 사실부터, 로버트는 끝내 이 세상이 다 연결되어 있으며 아름답다는 인식에 도달했다는 사정까지를 알려주는데, 이 목소리가 다름 아니라 로버트를 구제(救濟)해주는 말로서, 있게 해주는 말로서 존재한다.
Ⅱ. 임ㅁ애
인간의 불안이 본격적으로 생겨나던 시절,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관통하는 그레이니어의 삶에서 우리는 '두루마리처럼 말아 치워진 구세계의 반향(the echoes)을 느낄 수 있다. 늘 있던 것이지만[if you really look at it] 문명의 속도에 묻혀버린 구세계의 비교적 최근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그리 먼 시대도 아니건만 벌써 그 시대 사람들의 눈빛과 몸짓이 이렇게나 아련하고 멀리 느껴지는 것은 분명 이 무시무시한 문명의 가속 덕분일 것이다.
자신의 기원을 모르는 채 기차에 실려 온 그레이니어는 태생적으로 이미 어떤 '연결'을 갈망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영화적 설정이기에 그의 출생 배경 등이 다소 과격해 보이긴 하지만 사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하찮은 존재[the little insects you can't even see]의 불안을 피할 수 없고 그래서 연결을 확인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여전히 자연의 장엄함에 걸음과 숨을 멈춘다.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자연 앞에 서며, 해결을 구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함을 얻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감독은 우리가 여전히 느끼고 있는 구세계의 반향이 왜 두루마리처럼 말아 치워져 있는지, 누가 왜 말아 치웠는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직 여전히 그 잔향은 남아있으니 이제라도 경외심을 회복하자고 말한다. 타인에 대한 죄책감을 견디는 선택, 그것만이 우리를 불안에서 구원할 거라고 말이다.
그레이니어가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경외와 충만함, 그리고 그가 선택한 삶의 방식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특별할 것 없는 한 남자는 그의 이름을 불러 줄 그녀의 음성을 만나면서 비로소 삶을 시작했었다. 그리고 그토록 짧았기에 더욱 완벽했던 사랑의 갑작스런 상실은 그를 삶의 다른 쪽 면에 서게 한다. 밤의 경계로 향하고 있는 붉은 노을 아래의 두 사람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어쩐지 보는 사람이 불안할 만큼 '너무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그렇게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을 누르던 것은 마침내 사건으로 그에게 온다. 납득할 수 없는 재앙에 '도대체 왜'라는 외마디 항의를 끝으로 그는 이제 견디기를 선택한다. 중국인 동료에 대한 죄책감을, 500년 이상을 산 영험한 나무를 베어낸 죄책감을 인과응보로 받아들이고, 무엇보다 아내와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절절한 죄책감에 그는 스스로 책임지기로 한다. 불타버린 집터에 기대어 세운(raised a lean-to at his homesite), 간신히 서 있는 어떤 죄스러운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 그는 남는다. 속죄하는 듯한 그의 시간들이 흘러간다. 혹시나 돌아올지도 모른다(if they did)는 희미한 희망으로, 준비되어있기 위해서(he wanted to be ready for them) 그는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견디고 통과해 내는(going through) 고통을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몸으로 알게 된다. 모든 것이 얽혀 있다(It's all threaded together)는 것을. 그리고 혜성이 그랬듯이 그도 아무런 호들갑 없이 돌아간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나는 이 영화를 세 번 봤다. 영화를 독해하기 위한 시도만은 아니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다가오는 그것을 자꾸만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알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지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감독이 의도한 그 모든 복잡한 층위를 다 알 수 없더라도 괜찮았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추려주신 내레이션 문장들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비로소 수수께끼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레이니는 말이 없다. 그저 통과시키고 속으로 삭이는 그에게 나레이션은 그의 영혼의 말들을 대신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시적인 은유와 함축의 언어였다. 나중에 선생님은 '뉘앙스와 분위기와 톤의 영화'라고 평하셨는데, 그때 나의 느낌도 '말'을 얻었다. 경이롭고 아름다운 영상들은 나레이션을 통해서 완전해진 것이었다. 말이 없는 영상과 나레이션의 음성이 마치 자연과 인간의 연결을 풍기는 듯 하다. 영화가 끝나고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 삶에 나레이터가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