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누구인지, 자신이 태어난 날도 모르는 고아로 태어나 혼자 떠돌며 벌목과 철도공사 노동자로 살며, 거대한 산업화의 흐름 속에서 기록되지 않은 한 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늘 혼자인 그의 삶에 한 줄기 햇살 같은 여인, 글래디스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그 시간은 너무도 짧아 꿈만 같고, 그의 전부였던 모든 것을 잃고 난후 그의 삶은 고독과 상실의 고통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다.
무엇이 잘못 된 것일까? 왜 숲은 가족을 앗아가 버렸을까? 벌목현장에서 자신도 모르게 죽음에 이르게 한 중국인의 환영으로 죄책감을 느끼며, 500년 된 나무를 베어낼 때 인간의 영혼도 상처를 입는다는 안의 말. 모두가 자기 개입으로 가족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그는 그들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을 품고 숲을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기다리던 가족도, 어떤 신의 계시도 내려오지 않았지만, 절망을 견디며 기다린 시간은 그를 다시 살게 하였다.
남편을 잃은 상실의 아픔을 겪은 산불 감시원 클레어는 로버트의 아픔을 들으며 서로 위로를 나눈다. ‘숲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곤충 하나도 강물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죽은 나무가 살아있는 나무만큼 의미가 있고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 후 그레니어는 케이티의 환상과 경비행기의 경험을 통해 앞과 뒤, 삶과 죽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감각적으로 깨닫게 된다.
제목의 ‘기차의 꿈’은 그레니어의 꿈 이기보다, 시대와 문명이 꾸었던 꿈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아가는 기차의 꿈에서 소외된 한 인간의 삶이지만, 이 역시 자연의 일부로 생성되고 존재하다 때가 되면 조용히 소멸하는 완전한 하나의 과정이었고, 다시 숲의 일부가 되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순간, 슬픔과 원망과 분노는 자리를 잃는다. 설명되지 않아도, 구제되지 않아도, 그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이 영화가 감동적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어쩌면 한 개인의 보편적인 삶을 통해 그 삶을 있는 그대로 나열함으로써 그레니어의 삶의 어느 한 부분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표현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우리는 누구나 상실을 겪고 죄책감 속에 원인을 찾고자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무기력함이 존재한다. 생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운명을 받아드리며 또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정신이 존재한다.
Ⅳ. 는길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 노년에 이르러 그레이니어가 얻은 통찰은 그리 새롭지 않다. 흔히 들어봄직한 명제이다. 그러나 아무리 단순한 사실일지라도, 앎에 사무치는 것은 새로운 문제다. 거기에는 자신만의 비용이 든다. 그레이니어는 비용을 지불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깊이 느끼며, 연결성의 뿌리로 평온히 안착한 그레이니어. 무엇이 그를 이끌었을까. 유의미하게 보았던 특징들을 서술해 본다.
1) 사건성
그레이니어는 산불로 아내와 딸을 잃었다. 이 사건은 그가 겪은 생애 초기의 혼돈을 점화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의 부모가 누구인지, 자신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기본적 앎이 주어지지 않았다. 조별 토의에서 아무는 그를 “평생 알고자” 했던 이라고 평했다.
생애 초기의 상실로부터 그레이니어를 구제한 이는 그의 아내였다. 각별한 호명으로써, 의미의 차원으로 구출되면서 어쩌면 그는 최초의 삶을 얻는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비극. 전부를 잃었다. 〈왜〉라는 물음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계시”처럼 초월성을 동원해야만 하는 고통이다. 이해하려는 애씀은 무력에 대처하는 몸부림이기도 하지만, 영화에서는 다른 차원으로 진입하는 門이기도 하다.
2) 지속성
아내와 딸의 마지막을 보지 못한 탓일까. 정황상 자명한 죽음일지라도, 그레이니어는 1퍼센트의 가능성을 포기할 수 없다. 되돌아갈 수도 끝낼 수도 없는 갈림길에서 미세한 가능성에 삶을 묶는다. 그리고 숲으로, 일로, 슬픔과 고독 속으로, 침잠한다. 환각을 보고 환청을 들으면서, 애도가 불가능한 시간을 앓는다. 그의 특별한 점은, 증상에 떠밀려 경계가 모호한 곳으로 밀려나더라도 상실의 자리를 무엇으로 메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집념이 그에게 있다. 어쩌면 영화의 최종적 앎이 깃들 수 있도록 그가 한 일이란, 상실의 빈터를 지탱한 것이 아닐까. 이 무(無)를 매개로 미래적 앎이 다가서고 있던 게 아닐까 한다.
3) 언어성
그는 말수가 적다. 말의 비중이 극히 적은 인물이지만 둔감한 것은 아니다. 존재의 이면을 비추는 말들에는 유심히 참여한다. 에고가 소비한 말을 무의식이 돌아보지 않는다는 명제대로라면, 그에게는 발화하며 폭로하고 소비하는 창구가 없다. 말이 적은 이를 두고 말을 아낀다고도 한다. 영화는 말 없음에 대해 별 설명을 하지 않지만, 그가 언어를 아끼는 쪽에는 가까운 것 같다. 그는 언어 그 자체(기표)에 감응하는 몸을 가지고 있다. 줄곧 청(聽)자였던 것도 중요해 보인다.
4) 타자성
타자들은 어떤 연관 관계로써 등장한 것일까. 그레이니어의 삶에는 아내와 딸 외에도 질문을 남기는 타자들이 있다. 그들을 통해, 초보적인 인식이 변화해 간다.
연결성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일 것이다. 현재를 과거의 결과로 본다. 복수와 같은 처벌적 사태나 우연한 도움도, 행위가 행위를 부르는 연쇄 속에 있다. 벌목 현장에 등장한 낯선 사내를 보라. 그는 동생이 당한 일을 되갚는데, 이렇듯 명료한 행위도 있다. 문제는 많은 경우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막연한 두려움이 생긴다. 복수극이 벌어진 벌목 현장에서 그레이니어도 그랬을 것이다.
중국인 노동자의 등장은 행위의 차원을 확장시킨다. 직접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수동적으로 승인하는 폭력, 또 존재론적 차원에서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을 의식하게 한다.
아무래도 책임을 비추는 타자들은 두려움이나 죄책감을 자극할 법하다. 그러나 그레이니어는 두려움도 죄책감도 풍화될 만큼 오래 살았다. 그는 죽어간, 밀려난, 홀로 남겨진 타자들을 감각하며 책임을 알고자 했다. 점점이 긴장관계는 해소되어간다.
Ⅴ. 숙비
1. <Train Dreams>는 지루한 영화다. 영화를 보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관점의 여지를 주고 그 시선에 잡히는 맥락에 따라 다르게 말할 수 있는 만큼 지루하다. 하나의 상징으로 휘몰아가기보다는 장면의 순서에 따라 다양한 상징들을 배치해 하나의 귀결점으로 연결하며 나아간다. 그 귀결점은 물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라는 앎이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비단 ‘로버트 그레이니어’의 일만은아니다. 그래서 영화는 자칫 지루함으로 흐른다. 상징의 분포는 집중을 흐리고 나아가면서도 머물러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스펙터클과 판타지에 익숙해진 관객에게 그레이니어의 삶은 어디에고 있을 법한 평범함이다.
2. 영화의 장면은 이미지와 말(대사와 해설)로 나뉜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가 ‘말’로서 드러나는 결말이라면,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결론은 이미지로써 드러난다. 말이 선조성을 띠며 역행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미지 또한 풍경으로서 흐르는 시간의 선상에서 변화한다. 시간은 생성과 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용의 결과이다.
3. 말과 이미지의 조합은 그 자체로 상징성을 드러내며 영화에 복합적인 중층구조를 만들어 낸다. 그 상징 중 하나가 ‘기차’이다. 영화의 시작은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기차로부터 출발한다. 기차는 해설의 도움을 받아 ‘만물의 근본인 구세계’로부터 ‘신세계’로 나아간다. 기차의 이동은 시간/시대의 흐름/방향이 된다. 당시는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철도 산업이 발달하고 금광 계발에 중국계 노동자들의 참여가 활발하던 시기이다. 그레이니어는 기차의 선로를 놓는 일을 하던 중 중국인의 죽음에 관여하게 된다. 느닷없이 들이 닥친 백인남성들이 그레이니어와 함께 나무 켜는 작업을 하던 중국인 남성의 사지를 들어 협곡으로 떨어뜨리는 일에 잠시 손을 보탠 것이다. 중국인은 함께 일하면서도 낯선 외형을 가진 ‘이방인’이다. 그는 죽음의 인근으로 끌려가며 그의 모국어로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 함께 일하면서도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이방인은 기성 사회에 이물감을 자아내며 결코 그 사회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삶을 전유하는 인간에겐 죽음 또한 삶에 대한 이방인일 뿐이다. 중국인은 협곡 아래로 떨어지고 철도 공사는 성료된다. 그 후 죽은 중국인은 그레이니어가 가는 곳마다 환영이 되어 따라붙는다. 환영은 마침내 아내와 딸이 살고 있는 집까지 나타나 꿈속에 등장한다. 근본의 세계로부터 빠져나오던 기차처럼 캄캄한 어두움을 통과하는 기차의 바퀴에 불꽃이 튀고, 죽은 중국인은 오두막 창문으로 불이 번져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우두커니 앉아 있다. 불타는 오두막은 누구의 집인가, 화면이 바뀌며 어둠 속 기차는 어린 로버트 그레이니어를 향해 앞으로 돌진한다. 기차의 선로를 시간의 선상이라고 상상한다면 박진하는 기차는 삶인가 죽음인가.
4. 그레이니어의 아내와 딸이 그의 세상에서 사라졌다. 대규모 산불로 모든 것이 불타버렸다. 상실로서의 죽음이 그의 실존에 예고 없이 들어선 것이다. ‘가정(home)’으로 돌아오기 전날 밤 늙은 벌목 동료 얀은 말했다. “우린 여기서 500년을 산 나무들을 베어냈어, 본인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영혼에 탈이 나”,(…) “세상은 얽히고설켜 있어 실마리 하나를 당길 때마다 설계가 어떻게 무너질지 몰라 이 땅에서 우린 어린애에 불과해 신이라도 된 줄 알고 대관람차에서 볼트를 뽑아내지”. 그레이니어는 상실이라는 이름의 죽음을 곁에 두고 글래디스와 케이트가 사라진 자리에서 삶을 이어간다. 얀의 말이 그레이니어의 안에서 무엇이 되었을지는 그레이너만이 알 뿐이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 그레이니어는 말한다. “지난 몇 년간 자신의 삶에 위대한 계시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레이니어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가 기다렸던 위대한 계시란 무엇일까.
그레이니어가 마차 운반수로 직업을 바꾸면서는 숲 관리인 클레어 톰프슨을 만나게 된다. 가족에게 가장 필요한 순간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괴로움을 내비치던 그레이니어에게 클레어는 말한다. “숲에서는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어요. 모두가 얽혀 있고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이라고 선을 그어 말할 수 없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벌레가 강만큼 결정적인 역할을 해요. 죽은 나무가 산 나무만큼 중요하고요. 그런 걸 보며 우리도 배울 게 있을 거예요.” 나무를 베는 벌목꾼이었던 그에게 그녀는 숲과 숲 안에서 연결된 존재들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두 번째 중요한 상징 ‘나무(숲)’의 이야기다. 인간은 자연에 흔적을 남긴다. 벌목꾼이 나무가 굴러떨어지는 것을 피하지 못하고 죽자, 얀은 그가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을 염려해 죽은 벌목꾼의 신발을 벗겨 나무에 못 박기도 했다. 흔적의 상징이다. 산업이 발달하고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중에 나무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인간들이 지구와 사람을 파괴하는 흔적이 고스란히 숲에도 적용된다.
5. 마지막 중요한 상징은 나이 든 그레이니어의 ‘얼굴’이다. 벌목 현장에선 가로톱이 전기톱으로 바뀌던 때가 있더니, 그가 가끔 산책 나가는 도시 스포캔에선 우주로 올라간 우주선이 지구를 내려다보고 있는 티브이 영상이 나온다. 이 도시에서 그레이니어는 거의 10년만에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다. “세월이 남긴 흔적이 역력했다”. 그의 얼굴이 변한 것이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인생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았지만 삶은 서서히 그와 멀어지고 있었다.”
6. 다음 날 그레이니어는 ‘조종석 체험 4달러 비행’기를 타게 된다. 그리고 비행기가 공중의 사방을 오다닐 때 그는 불현듯 지나온 전체 삶을 반추하며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감각이 사라졌던 그때 마침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구세계와 신세계가 하나의 선로 위에서 다른 방향에 있듯, 삶과 죽음 또한 하나의 선로 위에 있었던 것이다. 로버트 그레이너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이고 그 방향이 어디로부터인지는 알 수 없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함께였고 인간인 그는 세계와 연결되어 흔적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변화해 나왔다.
Ⅵ. 권ㄷ환
이 영화는 20세기 초 서부 개척 시대가 저물고 산업화가 태동하던 격변기를 배경으로 주인공 로버트 그레이니어와 글래디스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그가 겪어낸 고독한 일생을 그린다. 친부모의 행방은커녕 자신의 생일조차 모른 채 20년 세월을 부유하던 그레이니어는 글래디스를 만난 후에야 비로소 삶의 의미에 싹을 틔운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그는 종교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세상에서 소외된 벌목공들의 삶을 관찰하며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세상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수집해 나간다. 그런 그에게 훗날 닥치는 글래디스와의 이별은, 손수 일궈놓은 오두막이 화마에 휩쓸린 것처럼 그가 모아왔던 의미의 조각들도 전부 재로 만들어 버리는 거대한 상실이었다.
마을 곳곳을 뒤져보지만 끝내 그들을 찾지 못한 그레이니어는, 죽은 사슴을 마주하고서야 자기 가족도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오열한다. 그러나 그레이니어의 인생에 글래디스와 케이트가 사라졌다고 해서, 혹은 인생의 의미를 다 잃어버렸다고 해서 그의 삶이 좀처럼 관심 둘 곳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이전의 방황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가족의 죽음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자기가 살던 땅으로 돌아가 인생을 재건한다. 재만 남은 땅 위에서 돋아나는 버섯처럼, 모든 것을 잃은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그레이니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레이니어는 떠돌이들의 삶을 관찰하고 운송업을 하며 이웃들의 삶을 관조만 하던 것을 멈추고 타자를 향해 직접 발걸음을 옮긴다. 톰슨을 부르며 초소를 향해 걷는 그의 앞에, 그녀는 하늘이 아닌 자기와 같은 길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에서 톰슨을 통해 그레이니어는 자신의 고통이 놓인 자리를 비로소 내려다볼 수 있게 된다. 그 후에도 그는 기다린다. 삶의 위대한 계시를 기다리고, 혹시라도 돌아올 케이트를 위해 자리를 지키며 기다린다.
이제 방향도 목적도 없이 도시를 배회하는 그의 모습은, 글래디스와의 만남 이전의 방황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이제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간절히 찾는 사람이다. 콘크리트와 강철로 만든 다리가 건설되어 쓸모가 없어진 옛 다리처럼, 자신이 기다리던 잃어버린 아내와 딸과 삶의 위대한 계시는 의미 없는 시간 들인가 싶다. 길거리 상점에 비치된 TV를 통해 우주의 모습과 우주에서의 우리를 메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보기만 한다면 모든 궁금증을 풀어준다는 연극에서 분장한 소년을 보고 그레이니어는 눈물을 흘린다. 10년 만에 다시 보는 거울에서 세월이 남긴 흔적을 보고 그제야 자신의 인생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다. “겪을 건 다 겪어야 끝이 난다.”는 톰슨의 말처럼, 그는 삶을 온몸으로 통과해 낸다. 경비행기 조종사의 ‘뭐라도 꽉 잡으라.’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그레이니어는 여태 아무것도 잡지 않고 있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로버트를 뒤에서 안아주는 보이지 않는 손길은 늘 곁에 있던 것이다. 마침내 그는 손을 움켜쥐지 않은 채로, 하나도 빠짐없이 삶의 모든 순간에 깃든 아름다움을 누린다.
Ⅶ. 박ㅇ름
“♪ 주님이 레드우드라면 그 나무를 베어내겠소? ♪ 아니면 자애로운 가지에 올라 둘러보겠소? ♪ 만약 저 강이 떠나간 모든 이의 눈물이라면 ♪ 댐을 지어 흐름을 막겠소? 아니면 흐르게 두겠소? ♪”
영화 엔딩 크레딧 말미에 나오는 ‘안 피플스(이하 ‘안’)’의 위 노래가 내 마음을 울컥하게 하였다. 그리고 여운이 남았다. 그 여운에는 ‘자연’을 생각하게 되는 면이 있었다. ‘자연’과 ‘함께’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이었다.
영화를 여러 번 보면서 나는 주인공보다도 영화 속에서 ‘가끔이지만 특별할 때 빛을 발하는 사람’이라고 소개되는 ‘안’에게 주로 관심이 갔다. 그가 소개되는 장면의 연출은 흥미로웠고 그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선 그의 말과 표정에 특별한 의미가 담긴 듯해 그 의미를 탐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안’의 노래를 통해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울컥한 감정이 들었던 것, 그리고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해 영화의 내용을 따라가고자 했음에도 자꾸만 ‘안’이 생각나고 그 인물에 관심이 갔던 것에 대한 호기심을 느끼며 ‘안’을 통해 내가 영화를 보며 인상 깊게 느꼈던 장면을 적어보고자 한다.
‘안’은 벌목 현장 노동자들과 깊은 밤 모닥불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우린 여기서 500년을 산 나무들을 베어냈어. 본인은 알아채지 못하더라도 영혼에 탈이 나.”라고 말한다. 이에 한 젊은 청년이 “내일 아침이면 주머니에 200달러가 들어와요. 제 영혼은 끄떡없습니다. 아주 멀쩡해요.”라고 말한다. 그 말에 ‘안’은 “자네 같은 미네소타 친구들은 역사를 몰라서 그래.”라며 답한다.
영화를 네 번째 보았을 때 이 장면이 조금 더 뚜렷하게 다가왔다. 이 전에는 ‘아,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면 안 되겠다. 나무를 도끼로 찍어내는 것은 내 영혼을 다치게 하는 것과 같다.’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갔던 것이 이번에는 젊은 청년의 말과 ‘안’의 말이 대비가 되며 인상 깊게 다가왔다.
‘안’은 역사를 알고 역사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조금 더 멀리서 조금 더 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젊은 청년은 곧 자기 손에 쥐어지게 될 200달러를 기대하는 모습을 통해 지금 자기에게 닥친 자기의 상황에 대한 것에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장면을 인상 깊게 생각하고 있다가 영화 후반부에 산림청 직원으로 등장하는 클레어가 “세상은 역사가 깊어요. 지금까지 안 겪은 일이 없겠죠.”라고 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알 수 없는 울림이 있었는데, 이는 ‘안’과 ‘클레어’에게서 무언가 공통된 것이 있으리라 하는 생각으로 탐구해보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였다.
앞서 말했던 모닥불 장면에서 ‘안’은 또 “세상은 얽히고설켜 있어. 실마리 하나를 당길 때마다 설계가 어떻게 무너질지 몰라. 이 땅에서 우린 어린애에 불과해. 신이라도 된 줄 알고 대관람차에서 볼트를 뽑아내지.”라는 말을 한다.
나는 이 말이 가장 인상 깊었는데, 이는 엔딩 크레딧에서 ‘안’의 노래를 들었을 때에 생겼던 여운과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벌목꾼이 벌목을 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자연’을 함부로 대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안’은 나무도 친구라고 했다. “가만히만 둔다면” 말이다. 하지만 “칼날을 밀어 넣는 순간 전쟁이 시작된다.”라고 했다. 영화를 보면서 ‘맞아, 나무는 사람을 헤치지 않아. 그런데 사람은 나무를 헤쳐. 나무는 죽거나 죽임을 당한 나무 정도라야 사람을 다치게 해.’라는 생각을 했다.
인간은 자연뿐만 아니라 동물도 헤친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그레이니어가 불로 인해 가족과 집을 모두 잃고 멍하니 불에 모든 게 다 타버린 옛 집터에 앉아있을 때에 그 근처로 곰 한 마리가 지나간다. 그때에 곰이 그레이니어를 헤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 흥미로웠는데, 그 이후에 그레이니어가 다시 벌목 현장에 나갔을 때에 곰이 사람들에게 잡혀 구이가 되기 직전의 모습이 나온다.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 자연과 동물을 나와 함께 한다 생각하지 않고 가치를 두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또 앞서 이야기 한 내용을 통해 역사를 모른다는 것, 그리고 크게 보지 않고 당장 나에게 닥친 문제들에만 집중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생각들이 익어 오래 뒤 다시 이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에는 또 어떤 것들이 새로이 보이고 어떤 감정들이 새로이 들게 될지 궁금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