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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4 21:46

깨진 와인잔

조회 수 332 추천 수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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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는 짝을 잃어 쓰임을 받지 못하는 그릇이 몇개 있다. 급한 성격으로 설쳐대는 통에 손에서 그릇을 놓치기 일쑤고 그릇끼리 부딪히며 일찍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망가진 그릇을 보며 튼튼하게 만들지 못했다거나 제 수명을 다했나보다며 그릇을 만든 이를 탓하거나 혹은 그릇 탓으로 돌릴 뿐, 내게 책임을 물은 기억은 없는 듯하다.


지난 속속에서 저녁식사 후 가스렌지 주변을 닦다가 상부장에 매달린 와인잔이 팔에 걸려 출렁거렸다. 놀란 가슴을 누르며 다시 하던 일을 하고 있던 중에 또 한번 잔들이 출렁이다가 그 중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내 손이 한번 훑고 지나가면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순식간에 말끔히 정리가 된다. 정리 정돈은 자신있는 분야라고 생각해왔지만 단순히 청소라는 것이, '장소화'와 연결되는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리적인 공간의 정리일 뿐, '장소화'의 과정중에 그곳에 놓인 사물들과 제대로 된 관계맺기가 내게는 부족하였던 것이다.


사린의 윤리 중 사물과의 관계맺기가 어떤 것인지, 그러한 관계맺기로 이루어지는 '장소화'라는 개념이 어떤 것인지 이전과 다르게 다가왔다. 손끝의 감각을 깨워 손에 닿는 그 사물을 깊게 받아들여야 했거늘, 사물과 내가 만나는 그 지점을 좀더 세심히 살펴야했거늘 내 실력의 부족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순신 장군은 '전투에 임할 때에도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 앉히고 항상 여유를 보였다'고 한다.  심지어 '운명하신 날에도 기율(紀律)과 절도(節度)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32전 32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기는 버릇'을 비롯하여 전시(戰時)임에도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차분함과 여유가 몸에 내려앉아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차분하지 못함으로 인해 일을 그르치고 미끄러짐은 내 고질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넘어서기 위한 구체적인 시도가 없었다. 와인잔을 깨뜨리는 사건이 발생하고서야 이 문제를 심도있게 살피기 시작했다. 내 몸에 내려앉아 이미 내가 되어 버린 서두름이라는 습성을  어떻게 벗어낼 것인가.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버릇을 들이는 것보다 가진 버릇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몸에 내려앉히는것은 갑절의 노력을 요할 것이다.


인문학의 공부는 '생활을 통해, 실력을 통해 임상성을 증명해야 하는' 것,  '삶을 통해 공부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끈기가, 내가 가진 무기라며 오래도록  말하곤 했는데, 지금은 최대의 약점인 차분하지 못함을, 잘 넘어서서 또 다른 무기가 될 수 있도록 몸에 내려 앉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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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레신 2022.01.15 08:07
    Festina lent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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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길 2022.01.19 08:30

    "인간의 실존은 조건적 실존이기 때문에 사물이 없으면 불가능하고, 사물이 인간실존의 조건이 되지 못한다면 한낱 아무 상관없는 품목 덩어리, 즉 비-세계일 뿐이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 옮김, 한길사, 2017, 76쪽.)

    四隣으로 '사물'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 혹은 희망은 여전한데, 그간 얼마나 그 관계가 진척되었는가, 이 글을 통해 다시금 질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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