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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인의 연극 공연을 보러 간 소극장은 명륜동에 있었다. 그 곳은 내가 이십대의 대부분을 보낸 동네이다. 그 때 세 들어 살던 집과 골목은 없어지고 십년 전쯤엔 조금 남아 있었던 모습들마저 더 이상 찾기가 어렵게 되어 한 순간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이십대 초반, 하숙을 하던 방에서 나와야 하는 사정이 생겨 급하게 방을 구해야 했는데 아담한 이층집의 방을 소개 받았다. 넓지 않은 마당에 붓꽃과 라일락이며 넝쿨장미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계약을 했다. 정원을 소박하고 정감 있게 꾸며 놓은 집주인 아주머니에게는 처음부터 호감이 갔고 팔년쯤 지내다 이사하게 될 때까지 한결같이 잘 대해 주셨다. 세 들은 방은 지내기에 조금 불편했으나 서울에서 혼자 지내는 각박한 생활 속에서 그나마 위안과 안정을 구할 수 있었던 세상의 유일한 장소이고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었다. 거기에서 학교를 몇 년 다녔고 졸업을 한 뒤 직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일요일이면 근처의 목욕탕엘 어김없이 갔고 틈틈이 잘 풀리지 않던 연애도 했으며 가끔 혜화동 로타리까지 걸어가 동양서림에서 책을 사 보았다. 안국동에 있는 문화센터 수영반에 등록해 어떤 오기로 열심히 다녀 상급반까지 가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더 나은 방으로 옮길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생긴 후에도 왠지 그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삶에 뿌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 곳에 깊이 내려져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을까. 서른이 넘어 이사를 나오게 되었을 때 중요한 무언가를 그 집에 두고 와 영영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 동네를 떠나면서 너무 길게 끌어온 청춘이 끝났다는 걸 알았고 나는 세상에 순순히 섞여 들어갔다. 그 동네가 급속히 상업화 되면서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가보고 싶지 않았다. 그 때의 시간들과 비로소 거리를 둘 수 있었을 무렵 찾아가 본 그 곳은 예상 했던대로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어서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소중한 기억의 일부분이 되돌릴 수 없이 훼손된 것만 같았다.

 

우리가 경험한 것과 사건들, 그 조금 하찮은 기억들은 엮이어 마법을 부리듯 우리를 꼼짝 못 하게 묶어 놓기도 하고 지난 날들에 빛과 생기를 부여해 주기도 한다. 그 기억들은 늘 어떤 장소를 배경으로 그 곳의 이미지들과 모든 감각과 함께 되살아난다. 사람에 대한 것이든 장소에 대한 것이든 스쳐 지나가는 중에 애착이 생기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긴 여행을 했어도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는 일이 있는데 그건 방관자로서 공간과 풍경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장소에는 공간과는 달리 겪어낸 시간과 그 위에서의 애환이 함께 겹쳐서 한 사람의 역사가 씌여진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는 어느 정도는 어디서 살았는가에 따라 규정되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삶이란 거쳐온 장소들의 경험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그 장소들은 바로 나 자신이고 나와 하나였지 않았을까.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경험한 시간의 폭은 질과 강도가 다른데 불안했던 젊음의 한 시절을 보낸 곳이어서인지 그 이층집은 각별하게 마음에 남아있다.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기억을 통해 언제까지나 따뜻이 되살아나 내 삶을 더 깊게 하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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