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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말의 영롱(玲瓏)

 


*

그 사람 말이 어째서 옥구슬 같았을까. 어째서 찬란하고 아름다웠을까.

 


*

시월 중순의 어느 화요일 정오 좀 넘어서, 온양온천역(溫陽溫泉驛)을 출발하는 무궁화호에 올랐다. 기차는 도고온천역(道高溫泉驛)을 지나, 신례원(新禮院) 예산(禮山) 삽교(揷橋) 홍성(洪城) 광천(廣川) 청소(靑所) 대천(大川) 웅천(熊川) 판교(板橋) 서천(舒川) 장항(長項) 군산(群山) 대야(大野)를 거쳐서 익산역(益山驛)까지 간다. 천안역(天安驛)을 기점(起點)으로 하여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다, 익산역을 종점(終點)으로 하는 장항선 철도노선이다. ()과 다리()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

내 자리는 창 쪽인데, 통로 쪽 자리에 모르는 여인이 앉아 있다. 통로에 멈추어서 허리를 조금 숙이며 안쪽이 내가 앉아야 하는 곳임을 알리자, 여인은 앉은 채로 몸을 통로 쪽으로 틀어서 내가 지나갈 길을 만들어주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검정 비닐봉지가 두 개 놓여있어서, 나는 별 수 없이 그것을 넘어가야만 했다. 여인의 기색은 순하고 내게 별 관심이 없다. 기차는 덜컹거리며 달리고, 창밖은 후미진 곳이라서 밝고, 후미진 곳이라서 사라지지 못한 비밀스러움으로 햇빛이 찬란하다. 억새꽃들 피어 희게 빛나고, 감나무에서는 감이 익어가고, 빈집들은 다시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 주저앉고 있는 중이다. 옆 자리의 여인은 잠들었고 나도 내 곁 사람의 순한 잠을 따라서 잠들었다.

 


*

곁의 사람은 예산에서 내렸다.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잠에서 깨어나면서, 내 잠은 흔들리고, 잠은 얼마나 여리고 부드러운지, 다른 사람들의 말이 이따금씩 내게로 굴러들어온다. “오빠 핸드폰 안 가지고 나갔어요?” 누군가, 나이든 여인이다, 전화기에 대고 또 누군가에게 묻는다. 오빠가 전화를 안 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오빠를 묻고 있다. 불안도 없고 조바심도 없이, 오빠를 찾는다. 잠결에도 여자가 오빠를 그리워하는 게 느껴진다. 기차는 어느 역인가에서 멈추었다가 다시 출발한다. “날이 추워진다고 하더니 날만 따습네.” 늙은 여인의 말이다. 막 기차에 올라 자리에 앉으며 누군가에게 건네는 말이다. 혼잣말인가? 어찌나 말이 순한지 내 귀도 단박에 순해졌다. 그게 좋아서 나는 자면서도 빙그레 웃었다. 당사자도 몰래 그 말소리에 내가 덕을 보았다. 드문드문, 옥구술 같은 말들이 굴러들어와 내게 그윽한 파문을 남긴다.

 


*

사전을 뒤적이는 순간이 아니니, 전혀 무죄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나는 잠결에도 내게 굴러온 말들이 영롱하고 아름답다고 감각한다. 말이 영롱하다. 발화되면서 곧 잊힐 말들. 순전히 타인을 향해서만 발화되었으되, 누구도 탐내거나 그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 말들. 어쩌다가 내게도 굴러들어와 빛나는 말들. 구슬처럼 독립한 말들. 이데올로기의 실현이 아니라, 그 자체가 그 전부인 말들. 승무원으로부터 제재를 받지 않는 말들. 찬란한 햇빛 받아 영롱했던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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