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158 추천 수 0 댓글 3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虛室'' essay_

겸허함이 찾아드는 순간.

    

-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새벽에 홀로 깨어 주방의 낮은 조명을 켜고 식탁의자에 앉아 책을 편다. 잠에 덜 깬 졸린 눈을 부빈 후 허전한 손을 한 번 바라보고, 아직 멍한 뇌를 한 번 생각하고, 향긋하게 그 시간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는다. 째깍째깍 가는 시간이 아까워 책에 시선을 한 번 줬다가 이내 일어나 머그컵을 찾아들고는 어쩔 수 없는 끌림으로 커피를 내려 손에 든다. 다시 앉은 식탁의자는 이전보다 따뜻하고 낮은 조명에 그윽한 향기가 스며 이제 무언가 된 듯 싶다. 펼친 책을 가만히 바라본다. 하지만 이내, 언제나 그랬듯, 펼친 책의 활자를 만나기도 전에 상념들이 먼저 찾아와 온 신경을 그리로 몰아간다. 언젠가부터 베인 나쁜 습이다. 엉킨 실타래처럼 꼬인 상념들이 불러들인 얼굴들은 언제나 늘 몽땅 무표정 하다. 그리고 그 무표정의 얼굴들에 덧씌우는 감정의 파노라마는 어느새 그 공간에서 나를 빼내어 감정의 홍수 속에 몰아넣는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온갖 감정의 오물 속에 파묻힌다. 미워하고, 좋아하고, 질투하고, 슬퍼하고, 원망하고 , 자책하며, 너는 왜를 외친다. 시커먼 굴속에 갇혀, 감정의 웅덩이에서 나오려 그렇게 발악한다. 발악하는 줄도 모르고 발악한다. 그러다 무심코 뻣은 손에 닿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자각한다. 아 나는 또 함정 같은 상념의 그늘 속에 빨려 들어가 있었구나! 곧 이어 뒤따르는 비난. 너는 이 시간을 또 허투루 흘려보냈구나. 너는 또 그렇게도 어찌할 수 없었구나.

 

- 그런 순간들이 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몸뚱이를 송두리째 잡아채어 끌어올려 줄 그런 이 찾아드는 순간. 늘 하던대로(습관) 하던 육신을 잠시 내려놓고 정신을 그 에 집중한다. 겸허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라 내게 왔던 시간을 이번에는 다르게 맞이해 본다. 겸허하게. 살아지던 육신이라 그냥 살던 그 습의 고리를 끊고 공간을 다르게 맞이해 본다. 겸허하게. 삶에 둘레가 차분해지고 상념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 마른 따뜻함을 간직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흘러가는 시간에 응하고 자리한 공간에 응한다. 겸허하게.... 온통 밖으로 향했던 시선들을 지금 여기의 내게로 돌려 그곳이 장소가 되는 순간을 모른체한다. 그리고 그 순간을, 가만히 머문다.

 

오래 지속되기 어려운 그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장소의 길을 만들고 책의 집으로 정신을 인도한다.

몸이 겸허해질 때 가져다주는 선물, 집중의 시간.

  • ?
    敬以(경이) 2019.11.01 10:28
    '금기'는 '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 집중의 시간, 응원합니다. ^-^
  • ?
    토우젠 2019.11.01 15:32
    납작 엎드려 복종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프로이트는 “집단은 복종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다.”(문명속의 불만)라고 그 근원을 폭로해서 복종의 경계에 달뜬 인간을 부끄럽게 했지만서도, 虛室의 그 흰 빛에 사로잡히고 싶을 때가 있어요.
  • ?
    遲麟 2019.11.05 08:06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새벽에 홀로 깨어 주방의 낮은 조명을 켜고 식탁의자에 앉아 책을 편다."


    어둠이 가시면서 푸른 새벽이 오기 직전에는

    편경(編磬)에 매달린 돌의 색깔 같은 흰 새벽이 있습니다.
    허실(虛室)과도 같고
    唯一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2 虛室'' essay_4. 정신 차렷! 몸 차렷! 허실 2019.12.28 194
51 Childhood Abuse Led Woman To Long Life Of Promiscuity 1 찔레신 2019.12.12 99653
50 공자님, 2 희명자 2019.12.04 206
49 虛室'' essay_3. 글쓰기와 자기이해 2 허실 2019.12.03 544
48 Girlfriend Learns The Secret Behind Man's Cheap Rent 2 찔레신 2019.11.29 38346
47 踏筆不二(4) 1 file 遲麟 2019.11.21 203
46 (위험한 여자들) #1. 페미니즘의 도전(정희진, 2013) 2 榛榗 2019.11.19 174
45 踏筆不二(3) 원령(怨靈)과 이야기하는 사람 2 file 遲麟 2019.11.15 129
44 虛室'' essay_2. 그 사이에서 2 허실 2019.11.09 136
43 (身詞) #1. 글쓰기의 어려움 4 榛榗 2019.11.05 327
42 踏筆不二(2) file 遲麟 2019.11.05 95
» 虛室'' essay_1. 겸허함이 찾아드는 순간 3 허실 2019.10.31 158
40 도로시(道路示) 8 file 敬以(경이) 2019.10.29 188
39 踏筆不二(1) 3 file 遲麟 2019.10.24 165
38 踏筆不二(0) 2 遲麟 2019.10.22 129
37 낭독일리아스_돌론의 정탐편 1 허실 2019.10.17 122
36 踏筆不二(연재예고) file 遲麟 2019.10.13 137
35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에 대한 단상 9 허실 2019.10.07 270
34 Do not be surprised if they try to minimize what happened/ Abigail Van Buren on Oct 2, 2019 1 찔레신 2019.10.03 141
33 진실은 그 모양에 있다 file 遲麟 2019.10.02 120
Board Pagination Prev 1 ... 6 7 8 9 10 11 12 13 14 ... 15 Nex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