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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9 15:24

行知(6) 후배-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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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되기

 

외부와 내부가 맞물려 있는 이상 주변의 변화를 통하여 스스로의 변화(변화 없음)를 가늠해 간다. 그러니까 공부로 살기라는 전환도 이전에 없던 관계를 얻고 이전과 다른 말을 하는 존재들과 사귀며 알아챈 변화였고새로운 호칭과 생소한 부름을 통해 생겨난 자기 배치의 결과이다.

공부의 장()에는 선학혹은 공부의 선배-후배가 있다. 이십대에도 영글지는 못해도 나름의 역할을 한 선후배가 있었지만 대학을 벗어나며 느슨한 결속은 풀렸고 -후배란 말도 잊혀져 갔다. 그러다가 몇 년 전 밀양에서 진행된 1박2일 <속속>에서, ‘선배라는 존재가 다시, 출현했다.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는데, 다음 날 일찍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까닭에 취침 시간이 되자 곧바로 잠자리에 누웠었다. 그런데 누워있으니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더 잘 들렸고 저편 방에서 선배님이라는 말로 상대를 높이는, 먼저 공부하신 분들의 대화를 듣게 된 것이다. 선배님아는 말이었지만 <속속>공부자리에서 다시 듣게 된 선배님이라는 말은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관계를 암시하는 듯하였다. 약간의 신비스런 아우라도 있었던 것 같다. 듣게 된 대화에서 유독 선배님이라는 단어가 각인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하는 분들의 낯선 언어게임에 접속하는 키워드처럼 생각된 것 같다. 그리고 차츰, 어색함을 모른 체하며 선배님이란 말을 입에 붙여갔다.

공부의 장에 들어 선지 3년이 되어가는 지금, 처음의 어색은 없지만 선배님이라는 말과 함께 생겨난 자기-배치는 계속 변화해온 듯하다. 그러다가 최근, ‘선배님이라는 말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는데, 주로 발화자였던 입장에서 수화자로 배치된 자그마한 사건 때문이다. 공부 모임에 들어온 신입숙인이 자기소개 메일에서 희명자 선배님이라고 호명한 것이다. 부를 때는 몰랐는데 선배님이라는 말을 듣게 되자 이 말의 무게를 실감했고, 흐트러진 자세를 고쳐 앉게 되었다. 신입숙인의 후배-의 어떤 태도도 개입했을 것이다.

선배님이라고 호명되자 후배로 자신을 배치하면서도 정작 후배-의 주체적인 노동은 없었던 깜깜한 영역에 불이 켜졌다. ‘後生可畏라는 말이 시사하듯 후배도 선배를 향하여 어떤 작용을 할 텐데, 마치 후배는 책임 면제에서 우위에 있는 듯 수동적이었고 책임에 무지(無智) 한 영역. 후배를 통하여 후배 된 내 자리가 드러났다. 수동적인 후배-의 형식이 뜻밖에 적발된 것이다. 그리고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이 생겼다. 나는 어떤 후학, 후배였던가

선배의 지혜와 공덕이 당장의 유익이 되는 순간에만, 선배-됨을 인식(인정)하고 잠시만 자신을 후배로 배치한 것은 아닐까 공부 길에서 선생님을 의지하고, 먼저 걸어 나간 선학과 동학을 의지하여 걸음을 배운다. 그리고 때마다 선생님 그리고 선배가 공부 길에서 자득(自得)한 이치를 후학은 적은 비용을 치르고 배워 걸음을 가속하기도 하니 먼저 공부한 존재가 곁에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복()이다. 그럼에도 눈먼 존재 형식이 인간에게 있어, 의존해 있는 대상을 시기와 질투의 대상으로 착시하거나 망각하는데, ‘선배도 예외가 아니다 한편, 의존 대상과 경합하는 에고는 자기 함몰에 빠져 예()도 잊곤 하니 어떤 후배 였던가의 물음을 차마 선배 된 분들에게 건네지는 못할 것이다. 서로 민망할 것 같다. 그렇다면 공부 자리에서 선학''선배'는 무엇을 감당하고 있는 분들일까. 그나마 선배의 시선에서 자신의 후배-됨을 읽고자 하는 것으로 에고를 규제하는 작은 지침을 얻을 수 있을까.

인간-됨의 정도는 사린과 맺는 관계로 증명되기도 폭로되기도 한다. 수동적, 눈먼 관계 형식이 다만 선배에게만 향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린(四隣), /식물, 사물, 사람, (), 그리고 내 과도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후배-되기 란 질문(門)이 생겨났다. 어떤 후배였으며, 어떤 후배가 되어갈 것인가라는 질문. 변덕없이 일관되게 자신을 후배 된 자리, 길을 묻는(借問) 자리에 배치할 수 있을까. 깜냥 밖에서 찾아온, 걸어나가야 할 길을 계시하는 질문으로 알고, 품고, 따라가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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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우젠 2020.06.23 11:14
    말과 말들이 가닿았다가 돌아와 다시 나의 무지를 건드릴 때, 무지의 나를 건져내 ‘깜냥밖’의 나를 숙연하게 할 때, 질문이 아득히 먼곳으로부터 초월하여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산책하게 할 때, 보이지 않던 사물의 자태가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웃기고, 울릴 때, 내가 없지만 네 옆에, 네가 없지만 내 옆에 나누었던 말들이 웅웅거리며 제 자리를 찾아갈 때, 당신이 키운 잎사귀가 바람을 일으켜 한 번도 가보지 않고, 누구도 모르는 곳에서 세계를 열어가고 있을 때
    그 때에 선배와 후배와 동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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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명자 2020.06.23 16:40
    누군가가 삼킨 말, 견딘 말, 가만히 둔 말, 묵힌 말, 끝까지 설명하고자 했던 말, 
    나와 다른 말, 아직 알 수 없는 말, 그리고 재서술 되고 있는 말(들)을 딛고, 조금씩 걸어 나아가는 것  같아요. 토우젠의 말도 제게 그런 힘, 이었어요.

    '四隣의 동무-되'는 말(들)을 새로 배우고,
    그 말(들)이 다시 우리의 무의식에 침투되어
    변화한 무의식이 생성시킬 공부하는 이들의 미래와 역사를,
    아, 팽주의 茶가 알고 있을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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