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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28 11:37

ㄱㅈㅇ, 편지글

조회 수 275 추천 수 0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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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선생님.

블로그에 자주 들러 선생님의 글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인사는 오랫만에 드리네요. 저는 공부가 모자라 사위를 에두른 집어등의 현혹에 꾀여 순간의 욕망을 뿌리치지 못하고 불퇴(不退)라는 비현실적 이상의 문턱 앞에 재차 넘어지고 맙니다. '처음의 버릇으로 되돌아가지 않아 변한 것(不反其初而化也)'이 공부의 성취라 하셨는데 매번 같은 개밋둑에 넘어지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자괴감이 들다가도 감(感) 또한 생각/변명/사치인 걸 알기에 종내 공부길이라는 제자리로 회향을 합니다. 비록 짧은 공부 이력으로는 불퇴라는 경지에 이르지 못하지만 담금질을 계속하며 유혹의 매체들을 어렵사리 하나씩 끊어내며 공부길로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물론 변화는 의도와는 다르게 단댓바람에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몸에 밴 버릇은 습기의 강도에 따라 변화의 임계점이 제각각이므로 공부길에서 결별하는 옛욕망의 통시적 시점도 역사에 비례하여 제각기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게서 떨쳐내기 가장 어려웠던 버릇은 술이었습니다. 대학에 입학 후 본격적으로 들붙어 근 25년이상 달고 살았던 술은 세월의 더께에 습합한 몸의 역사로 인해 욕망의 영도를 얻어 술을 넘어서기까지 치른 시간과 비용은 한량없습니다. 수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겨끔내기를 이어오다 이제서야 결실을 맺었습니다.

저의 공부길에서 몸의 옛길이 주는 강박을 넘어 어렵사리 선용의 단계로 접어든 매체들이 몇 있는데 나열해 보자면 소비, 담배, 게임, 생각(마음), 핸드폰(전자매체) 등속을 들 수 있겠습니다. 소비자 인간이 이 시대를 대표하는 클리셰지만 저의 소비는 책을 구매하는 경우에 국한(局限)하고, 담배는 한때는 저라는 사람의 표징(表徵)이었지만 이제는 선용을 거쳐 피지 않는 단계에 이르렀고, 게임은 제 젊음을 앗아간 환상이었지만 지금은 아들 녀석과 정해진 시간 친목을 위해 작정하여 즐기며, 생각은 인간의 상징이지만 감정을 일으키는 마음을 최소화하도록 훈련과정을 거쳐 공부를 위해서만 되도록 사용하고, 핸드폰(전자매체)은 자본과 기술의 시대에 환상의 거울상을 복제하는 단말기이지만 사전이나 글을 쓰거나 선생님의 글을 읽는 용도로 제한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근자 대학을 보기에 앞서 독대학법(讀大學法)을 읽던 차에 '溫故而知新'을 새겨 주는 구절이 있어 그 내용을 살펴보니 흔히 알고 있는 상투적 해석이 아니라 적바림하였습니다. ‘대학을 하루에 한 차례씩 읽다 보면 달이 가고 날이 가면서 스스로 터득하게 되니 溫故而知新이란 이런 것이다'라 돼 있습니다. 요체는 나날이 읽는 것은 같은 도리(道理)가 담긴 대학이지만 반복 학습을 통해 자신의 변화(意思)와 더불어 새로운 것을 보는 것과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그저 고전의 중요성을 얘기한 것으로 가볍게 읽었던 '溫故而知新'이 선생님의 책을 반복하여 읽는 과정에 체감한 '익힘(習)'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구로 되새김돼 자리매김되는 과정을 보며 공부길도 이와 같이 낡은 몸에 새길을 내는 '근기'와 일맥상통함을 메타적 시선으로 굽어보게 된 소소한 발견이었습니다.

”‘世の中は地獄の上の花見かな’, 인간만이 절망인 지옥 위에서 꽃구경하는 게 좋아 내로라하는 유수의 꽃을 좇아 세계 각국을 누비었지만 땅에 뿌리를 박지 못한 화려한 조화들은 향기를 잃고 매력 발산을/유혹을 하지 못했습니다. 여행에 지쳐갈 즘 우연히 고개를 돌린 앞마당 찔레꽃과의 만남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었고 그 그윽함에 젖어 상춘객은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객은 꽃구경이라는 의도를 잊고 찔레가 되고자 그 심연에 몸을 담고 허우적거린지 꽤 되었는데 어느새 뿌리 하나가 땅속에 발을 내렸습니다.“

공자가 '불혹'이라 부른 마흔에 인문(人紋)에 관심을 두던 차 '차마, 깨칠 뻔한' 선생님의 책을 만나 쓰신 책들을 구해 틈틈이 읽어왔습니다. '봄날은 간다'를 접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는데 그 만남은 인생의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이 됐습니다. 스무살 언저리에 '미로 속에 자유는 없다'고 시를 끄적이던 청년이 그 자유의 길을 번득 보여준 선생을 좇아 생과 무관한 줄 알았던 공부길에 몸에 묵은 때와 게으름이라는 변명의 무게를 등에 지고 어렵게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인데 도서관(館)은 유령의 무덤(棺)이라 여겨 책을 멀리하고 글쓰기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고 기피하던 공대생이 선생의 삶(공부)이라는 생산적 권위를 만나 선생이 제시한 입장에 서서 바투 다가가 배워야 한다는 의욕이 발동한 것입니다. 만나는 데도 준비가 필요하고 단번에 알아 볼수 없으면 영영 알아볼 수 없고 인생을 구원하는 것은 재능이 아니라 태도가 문제라던 선생님, 저 멀리 달아나는 선생님의 옷자락 하나 붙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생각은 뒤로하고 쓸데없는 책을 읽는다는 아내의 잔소리(無用卽大用)를 위안삼아 오늘도 걷습니다.

자주 소식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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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찔레신 2023.04.28 11:38

    *이 글은 독자인 ㄱㅈㅇ 씨의 편지인데, 공부길의 한 자락 경계로 삼을 만하여, 그이의 양해를 구해 이곳에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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