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精-熟, 學-思, 切-近 , 賢-開
63. “詩가, 또는 문학이 말을 순결하게 한다는 것은 문법의 한계에까지 나아가 말의 잉여적 의미, 따라서 불결한 의미를 소비하고, 그 기호적 특성들을 제거하여, 그 말들 하나하나를 그것들이 최초에 만들어지고 발음되던 순간으로 되돌린다는 것이다.” (황현산, ‘위반으로서의 모국어, 그리고 세계화’)
64. “사회적 억압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모방하는 것이다.”(호르크하이머)
65. '딸과 여자'(<경향신문> 칼럼)
딸은, 여동생은, 조카는 여자일까, 아닐까? 혹은 돌려 말해서, 아버지는, 삼촌은, 혹은 오빠는 그 관계와 역할과 지위를 얌전히 보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남자를 얼마나 감추거나 변색, 혹은 탈색해야 할까? 마찬가지로 이들은 생활의 여러 계기와 관계의 변화에 따라 겨끔내기로 소용되는 자신의 여자, 혹은 남자를 어떻게 배치하고 분배하는 게 현명할까? 아내와 어머니가 가족 속의 남자들(남편과 아들들)과 관련해서 이미 충분히 안전하게 동화된 반면, 남편과 특히 아버지는 그 여자들(아내, 그리고 특히, 딸들)을 향해서 아직 충분히 ‘중성화’되지 못한 존재일까? 여태 적절히 중성화되지 못한 아버지들이라면 그들은 ‘실내’에서 그들의 딸들과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가족의 역사는 내적 결속과 안정을 기할 정도로 튼실해 보이고, 족외혼(族外婚)의 배치에 그 기원을 두는 가부장적 체제는 여태 지속되건만, 딸들은 왜 여태 그 아버지들의 성적 먹잇감이 되고 있는가? 왜 그들은 위험과 낙인의 수치를 무릅쓰면서까지 족내(族內)에서, 실내에서, 제 핏줄 속에서 쾌락을 구하려고 하는가? 더구나 우리 사회처럼 어느 초등학교로부터 반경 수백 미터의 거리 내에서만 20여개의 성매매업소를 적발할 수 있다는 접근-‘성(性)높은’ 편리한 사회에서, 왜 딸들은 지속적으로 아버지들에 의해 강간당하는가?
근자 대검찰청이 밝힌 통계에 따르면, 2008년에 293건이었던 친족 성범죄는 2010년 369건에 이어 지난해 469건으로 늘었다고 한다. 불과 4년 동안 60% 이상이 늘어난 셈이다. 물론 내게 이 따위 통계는 달밤에 원숭이 하품하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내 추정은, 누구나 그 실상을 들으면 입이 떡 벌어져서 2박 3일 동안 차마 닫지 못해 턱주걱이 마비될 정도의 수치에 이른다. 그러나 앞의 통계치는, 이미 그것만으로 온 몸을 관변식(官邊式)으로 파르르 떨면서, “최근에는 이혼율이 높아져 의붓아버지로 인한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고 구차스러운 사족을 달아, 굳이 친아버지들을 구제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물론 내 추정은 냉소적이거나 외람되어 보이기까지 하고, 이를 실증할 통계자료도 빈약하다. 그러나, 그 누구의 표현처럼, 때론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보다 ‘가능성의 중심’으로부터 사유하는 것이 외려 더 진실에 바투 다가선다. 욕망의 진실과 관계의 이면에 대한 대범하고 근본적인 탐색과 분석은 생략한 채, 어렵사리 폭로되어 겨우겨우 처벌되는 범죄 사례들에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면서 기존의 체제와 관행을 서둘러 미봉하려는 태세는 단지 무책임할 뿐 아니라 사악하다.
‘스위트 홈’의 이상을 품은 가족이기도 하지만, 밖에서 보자면 그것은 일종의 이익집단이기도 하다. 학자들은 아예 자본주의적 단말기로 여기거나 마지막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일종으로 보기도 하지 않던가? 그러나 구성원들간의 내부 관계는 이해(利害)보다는 사랑이니 친밀성이니 추억이니 하는 ‘리비도적 결속’을 그 알짬으로 한다. 그러므로, (프로이트가 잘 밝혀 놓았듯이) 가족 공동체의 성립요건과 유지의 비결은 당연히 때로 위험할 수도 있는 리비도적 결속의 정념을 성공적으로 승화하는 것에 있다. 당연한 것이지만, 이 지침은 엄격히 성행위를 금지하는 관계들(가령, 부녀관계)의 경우에 극도로 중요해진다.
그러나 터부시된 이 금지의 지침이 도덕적`법적 규제의 안목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태고적 깊이에 닿아 있다면 대체 어쩔 것인가? 강한 의미의 터부(taboo)에는 다 그런 점이 있듯이, 터부시된 행위 그 자체 속에 인간의 가장 깊은 욕망이 내내 들끓고 있다면 어쩔 텐가? 친아버지가 친딸을 겁간하는 일에 경악하고 사갈시하거나, 차츰 잦아지는 사건보도를 놓곤 혀를 차면서 시태(時態)만을 탓하거나, 혹은 ‘미친 놈들이 제법 있군!’이라면서 고함을 지르는 일로서는 영영 볼 수 없고 풀 수 없는 것들이 바로 우리들 속에서 암약하고 있다면 대체 어떻게 할 텐가? 혹시라도, 애초에 남자들은 야성의 외부로부터 실내로 들어와 중성화된 아버지되기의 문턱에서 좌절한 존재였다면 어쩔 것인가, 말이다.
66. 物心がつく, 철든다, 懂事 (dǒng shì)
67. “풍부함과 폭력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께 분석해야 한다...그것은 단순히 풍부함의 사회학적 부조화의 문제가 아니라 풍부함 그 자체의 근본적인 모순의 문제다...따라서 풍부함은 낙원, 꿈에서 보았던 부도덕한 사치를 손에 넣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도덕에 지배되는 객관적인 새 상황이다. 객관적으로 말해 풍부함은 진보가 아니다. 진보와는 전혀 별개의 어떤 것이다...만약 풍부함이 자유를 의미한다면 우리 시대의 폭력은 도저히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풍부함(성장)이 강제라고 한다면 이 폭력은 절로 이해될 수 있으며, 풍부함의 논리적 귀결로 간주할 수도 있다...죄의식, 막연한 불안, 뿌리깊은 부조화 등은 현재의 체계 그 자체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체계의 논리적 발전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다...그 결과 욕망의 부정적 측면은 자신을 투기(정신집중)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고뇌의 거대한 잠재력으로 결정(結晶)한다...욕구의 끝없는 충족을 낳는 풍부한 사회는 이 충족에서 생기는 고뇌를 완화시키고자 전력을 다하는 것이다.”(장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
68. “중개자와 주체가 각각 그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가능성이라는 두 구형(球形)에서 둘 사이의 거리가 서로 접촉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떨어져 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외면적 간접화(médiation externe)라고 부른다. 또한 그 두 구형이 서로 어느 정도 깊이 침범할 만큼 그 둘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좁혀져 있을 경우, 우리는 것을 내면적 간접화(médiation interne)라고 부른다...외면적 간접화의 주인공은 자기 욕망의 진정한 성격을 큰소리로 선언한다. 이 주인공은 자신의 모델을 공개적으로 존경하고 스스로 그 제자임을 자처한다...그러나 내면적 간접화의 주인공은 자신의 모방계획을 자랑으로 여기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감춘다...내면적 간접화의 세계에서 모든 욕망은 동일한 대상을 향한 경쟁적 욕망들을 생겨나게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드러내게 된다면, 그는 매순간마다 자신에게 새로운 장애물을 설치하는 셈이다. 사랑에서와 마찬가지로 거래에서도 성공의 비결은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르네 지라르, <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69. “In this kind of coevolution things happen that serve to spread memes whether or not they spread genes: the dog is off its leash and the slaves have rebelled against their former owners...I suggest that the human brain is an example of memes forcing genes to build ever better and better meme-spreading devices.”(Susan Blackmore, <The Meme Mach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