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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 wird nicht dadurch erleuchtet, daß man sich Lichtgestalten vorstellt, sondern durch Bewusstmachung der Dunkelheit.“
(K. G. Jung) (사람은 빛의 형상을 상상함으로써가 아니라 어두움을 의식화함으로써 스스로 밝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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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라고 불리는 것은 의식 및 그 내용과 같지 않다. 무의식을 부인하는 것은 오래된 보수주의이거나 무지한 것에 대한 공포일 뿐이다. 포앙카레(J. H. Poincare)의 경우처럼 물리학적 성과조차 무의식적 활동에 의한 직관에 의존한다...심지어 무생물조차도 상징적인 양식을 설정함에 있어서 무의식과 협력하는 듯하다. 

„Menschen tun alles, egal wie absurd, um ihrer eigenen Seele nicht zu begegnen.“
(인간들은 자신의 영혼을 만나지 않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한다...쉼없이 어리석게)

-개인의 무의식도 개인사를 넘어서 모든 이에게 공통된 특징을 지닌다. 인간의 상징들은 집단적-종교적이며, 태고의 꿈이나 창조적 공상에서 생겨난 '집단적 표상'으로서 자연히 현현하며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적으로 알기 힘든 것은 종종 무의식에 의해 포착되며 이는 꿈을 통해서 전달가능하다. 꿈의 상징은 본능이 합리적인 세계에 보내는 중요한 메시지이다. 꿈은 인격의 결함을 보완하거나 동시에 그 현재의 방향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러므로 꿈은 늘 성적 비유 이상을 포함한다. 


-꿈의 기능과 성격은 대략 4가지다. 자율적으로 구성되며, 보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숨겨진 욕구를 드러내며, 마지막으로는, 위험을 경고하는 등, 예시적인 뜻이 있다. 


-그늘(Schatten, shadow)은 페르조나(Persona)의 대극점이며, 통상 배척되고 금제된 욕망, 감정, 태도로서, 대체로 꿈 속에서 기분나쁜 형상으로 의인화된다. 이는 사회적 성숙과 교육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유아적인 양태를 취한다. 사회가 경직될수록 이 영역은 늘어나지만, 인간은 자신의 어두운 부분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Die Kenntnis der eigenen Dunkelheit ist die beste Methode, um mit den Dunkelheiten anderer Menschen umzugehen.“
(자기자신의 어둠을 아는 것이, 타인의 어둠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

„Der Anblick des Bösen zündet Böses in der Seele an. Das ist unvermeidlich.“

(악을 바라 보는 것만으로 영혼 속에는 악이 점화한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꿈은 무의식의 고유한 표현이다. 꿈의 종류는 대개 2가지인데, 집단적 꿈은 신화나 역사적 비유를 참조해야만 해석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고, 개인적 꿈은 개인 무의식에서 생성되면서 꿈꾼 사람의 개인 생활과 연관된다. 꿈은 마음 전체의 평형성을 이루게 하는 재료를 산출함으로써 심리적 평형을 회복시키는 보상적 성격을 지닌다. 정신적 안정과 신체적 건강을 위해 무의식과 의식은 하나로 결합되어야만 한다. 

„Alles, was uns an anderen irritiert, kann uns zu einem tieferen Verständnis von uns selbst führen.“
(타자에 관해서 우리를 불안케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에 관한 깊은 이해로 이끌 수 있다.)

-원형(Archetypus)은 무의식 속에서 유전되어 온 심리적 기능이다. 이는 '고대의 잔재'(프로이트)이며, 개인적인 변수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원형은 그 기본적 패턴을 유지하면서 다양하게 변형되어 나타난다. 미지의 다양한 것들이 무의식에 의해 직관적으로 파악되고, 원형적인 처리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주인이 아니며, 인류는 무의식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는 하나의 인간일 수도 있다. 

„Früher oder später werden sich Atomphysik und Psychologie des Unbewußten in bedeutender Weise annähern, da beide, unabhängig voneinander und von entgegengesetzter Seite, in transzendentales Gebiet vorstoßen, jene mit der Vorstellung des Atoms, diese mit der des Archetypus.“
(조만간 원자물리학과 무의식의 심리학은 의미있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접근할 것이다. 이 둘은 서로 독립적으로, 그리고 대척적인 방향으로부터, 초월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원자물리학은 원자에 관한 표상으로써, 그리고 무의식의 심리학은 원형의 표상을 지니고.)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는 보완적 측면을 지니며, 의식과 무의식의 중계자 노릇을 한다. 아니마란, 여성 그 자체에 관한 무의식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집단적인 이미지인데, 원형의 일종으로서 여성성의 이해에 지속적인 영향을 행사한다. 


-자기(das Selbst)는, 의식 域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에고와 달리 존재 전체의 중심이다. 이것은 동시에 모든 생물체나 우주와의 긴밀한 관계를 인식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 남자와 여자, 선과 악 등의 요소들을 종합하는 기능을 한다. 특히 융의 경우 그의 사상은 그의 일생에 대한 알레고리적인 환치로 배치될 수 있는데, 그의(사람의) 일생은 곧 무의식의 실현과정이며 이것은 다름아닌 자기와의 합일이기도 하다. 

„Eine große Wahrheit ist eine Wahrheit, deren Gegenteil immer noch eine Wahrheit ist."
(큰 진리는, 그 반대도 역시 하나의 새로운 진리가 되는 바로 그러한 진리다.)

„Bis Sie das Unbewusste bewusst machen, wird es Ihr Leben lenken und Sie werden es Schicksal nennen.“

(당신이 무의식을 밝히기 전까지는, 무의식이 당신의 삶을 조종할 것이며, 당신은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를 것이다.)

„Zeig mir einen gesunden Mann und ich werde ihn heilen.“
(건강한 사람을 내게 보여다오. 그러면 내가 그를 치료해줄테니.)


-융은 명시적으로 기독교를 믿지 않았지만, 그 사상적 모태 중의 일부는 기독교의 신비전통이랄 수 있다. 그래서 프로이트와 달리 그는 종교를 정신의 건강하고 긍정적인 기능으로 여겼으며, 피히테(Fichte)와 같이 인간의 정신을 스스로 창조해가는 실재로 간주하였다. 그에게 있어 종교란 환상이나 미신의 집합체가 아니라 의미와 목적을 추구하는 심리적 운동이었다. 상징과 원형에 집착하는 융은 특히 카톨릭의 성사에서 그 풍성한 표현을 읽었고, 그는 평생 기독교 신학, 연금술, 점성술, 영지주의(gnoticism), 도교, 요가 등에 집요한 관심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