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회 속속 복습 문장
1. 돌아가지 않는다.
1.1. 어떻게 보면 돌아가지 않는. 또 돌아가는구나! 하지 않는. 이런게 생기면 새로운 자득이 생기겠죠. 여러분이 생활가운데 다시 돌아가지 않는 부분을 점점이 만들어야 해요. 나는 옛날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 몸. 그런 의지. 우리가 몸짱은 못되어도 부분부분 그런 몸을 갖는 것이 무시무시한 인간이에요. <돌아가지 않는 몸을 가진 사람이 숙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숙비랑)
1.2. 선생님께서 변화와 자득을 근심하는 학인들에게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서툴다”라는 것과 같다고 일러주셨습니다. 공부의 요령으로써 ‘돌아가지 않는 마음(들)’이 여기저기에서 생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며 설명해 주시기를, 바다의 물살과 함께 놀며 물살을 탈 수 있게 된 몸은 서툴게 빠져 죽는 상태로는 되돌아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되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육체가 탄생한 것과 같습니다. 공부도 사람의 일이기에 온통 되돌아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방면에서 “나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는다.”라는 대목이 생겨야 한다고 합니다. 완전히 ‘몸에 착근한 버릇’이 수문장처럼 그 일을 해냅니다. 이는 새로운 다리가 생긴 것이며, 새로운 몸, 새로운 정신적인 수위, 새로운 욕망, 새로운 재미, 누림, 버릇, 관계, 취향이 생겨나 버린 것입니다. ‘또 돌아가는구나.’라고 낙담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생활 중에서 다시 돌아가지 않는 지점을 계속해서 형성해 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되)돌아가지 않는 몸’을 갖게 되는 존재. 서툰 상태에서 벗어나 (되)돌아가지 않는 몸과 실력을 가진 이, 숙인이 되어갑니다.(는길)
1.3. "공부는 돌아가지 않는 것이고 (不退轉), 돌아가지 않으면 自得이 생긴다"고 하셨다. 그래,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初心不退轉).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방안의 가구를 재배치 하고서는 방을 바꿨다고 착각(는길)"을 하게 되지는 않을까? (상인)
1.4. 선생님께서 지난 장강에서 존재의 부끄러움에 대해 말씀하셨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곳은 내가 다가갈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산책길에 가수 정태춘 붓글씨 전시회가 있어 잠시 들렀다. 어느 한 액자에 ‘하찮은 내가 이 문명의 혜택을 받아 이 정도로 사는 것에 감사’하다는 취지의 글을 발견하고 선생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이번 속속에서도 누림은 긍정적인 것보다는 독특하게 슬픈 것이기도 하다고 하셨다. 존재를 얼마나 정묘해지게 만들어야 저 곳에 닿을 수 있는 것일까. 그 방법은 선생님께서도 매번 강조하시는 것처럼 자기만의 고유한 실력과 생활양식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실력은 다시 돌아가지 않는 몸을 갖게 되어 여기저기 군데군데 하나의 버릇이 생기는 것이다. (조ㅇㄴ)
1.5.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가 시달리고 있는 것은 자득이 안 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소식없음’말입니다! 정말 마음의 경계라는 것은 자기보존을 하려고 온갖 애를 쓰기 때문에 경계를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내가 종종 엉뚱한 짓을 해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어려운 길을 ‘우회’해볼 수 있을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정도(正道)였지만 이제는 우회로 중 하나, 좌도(左道)가 된 것 중 하나는 ‘스승의 인격’ 같은 것입니다. 표정이 있고 말하고 어떤 인격을 품은 실력이 있고 역사가 있는, 그러한 스승의 인격의 비전으로부터의 배움이 있죠. 또 하나는, ‘誤處卽悟處’, 라는 말로부터 나오는 ‘틀린 자리’에 관한 겪음이 있습니다. 다양한 오처(誤處)를 겪으면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마침내 돌아보지 않는 그런 마음을 얻게 되는 길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유재)
2. 誤處卽悟處
2.1. <誤處卽悟處> 틀린 자리가 꼳 깨닫는 자리다. 몸이 달라지면 내부(생활)도 변할 수 있음을 알려주시며 긴 공부 길에 정한 커리큘럼을 통해 얻을 수 있겠지만 그 외 공부의 우회적인 방법(엉뚱한 짓) 해 보기를 주문하셨다. (연이정)
2.2. "마음의 경계는 자기보존을 위해 애씁니다. 제도가 인정하지 않는 좌도(左道)를 쓰며, 엉뚱한 짓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오처즉오처(誤處則悟處), '잘못된 곳이 곧 깨달음의 자리다', 공부의 우회성을 말하고 있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자득을 위한 공부는 우회를 피할 수 없습니다, 몸과 생활을 흔들어보며, 새로운 길이 생기도록 실험해보는 것이좋겠습니다." (단빈)
3. 경행
3.1.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메시는 공을 차면서 어떤 경우에도 넘어지지 않아요. 중심이 낮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면도 어떤 매개와의 관계를 야무지게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경행에 관한 말씀에서 마음차림만으로는 부족하고 몸의 차림도 챙겨가는 것이 중요함을 일러 주셨다. (여일)
3.2. "경행(經行)을 해야 비로소 숙인"이라고 배운 바에 따르면 저는 여전히 숙인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지난 속속에서도 "경행을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위빠나사처럼 마음 차림뿐만 아니라 몸이 안 바뀌면 안 되겠다. 실제로 몸이 안 바뀌면 안 되겠다. 몸이 단전을 중심으로 재배치된 느낌, 정신적인 명민함을 주는, 밸런스를 얻게 하는, 밸런스를 갖게 하는, 가장 중요한 훈련이 단전잡기다. 단전잡기, 밸런스를 잡기 위한 예비적인 훈련으로 경행이다. 잘 안 넘어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잘 안 넘어지는 선수가 메시다. 어떤 경우에도 안 넘어진다. 넘어지지 않는 것이 정신적으로도 명민하게 만든다. 내 몸이, 내 몸 아닌 것과 갖는 관계가 예민해야 된다. 이것(경행)을 꼭 해야 된다. (그래야) 자기만의 세계와 자율성을 갖게 된다." 저는 경행을 더욱 실천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마침내, "발바닥과 단전(丹田)이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매번 확인하는 체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지린)
3.3. 자기 몸과 내 몸이 아닌 외계와의 관계 맺는 방식에 있어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넘어지지 않게 몸의 균형을 잘 잡기 위해서는 낮은 중심으로 자기 몸을 이용해서 정신적 중심 ,균형 잡기가 중요합니다. 자기 깜냥껏, 자신에게 맞게 잘 훈련하면 일상생활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갖게 되고, 바깥과 상관없는 자기만의 자율성을 갖게 되는 것, 이것이 실력입니다. (연이정)
4. 예의 기원과 ‘지금, 여기’의 예
4.1. 복습시간, 선생님은 중용의 禮를 설명하시며, "엘리아데는 '특정한 의례(ritual)가 우주를 돌아가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땅에서 묶으면 하늘이 묶인다'라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과 비슷하지요. 내가 묶이면 우주가 묶인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 John Wheeler는 말했습니다. No phenomenon is a real phenomenon until it is an observed phenomenon.이것은 어떤 현상도 그것이 관찰되기 전(누가 보아준 현상이기 전)까지는 실재하는 현상이 아니라는 말인데, 모든 존재는 의식이라는 뜻입니다." (임MO)
4.2. 한문 수업 중에 "고대의 예(禮)는 인간의 본성이었어요. 인류 문명이 상례(喪禮)에서 출발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는 선생님 말씀은 인간 정신의 진화사에서 예(禮)가 얼마나 중요한 매개였는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공자가 예(禮)로써 바라보는 혹은 표현하고자 하는 정신은 어떠한 풍경일지 궁금했는데 지금 우리에게 예(禮)는 어떤 매개로 다시 되살려야 할지 고민이 된다. (여일)
4.3. 상스러운 평등 속에서 '예의 복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는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 묶인다고 했습니다. 우주, 자연과 인간이 근본적으로 연결 되어 있고, 반복되는 상징적인 행위(ritual)를 통해 인간 세상 뿐 아니라 우주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말씀도 해 주셨다. 내 작은 행동, 하나의 성취가 나의 구제 뿐 아니라 인류에게 중요한 보편성을 열어주는 길(가능성)이라고 말씀 하신 것과도 연결이 되었다.(연이정)
4.4. 선생님께서는 예(禮)의 기원이 상례에서 비롯하였음을 말씀하시고 ‘적절한 슬픔[哀而不傷]’이 예의 기본을 이룬다고 하셨다. 이 대목에서 공자가 안회의 장례를 두고 제자들과 의견을 달리한 것이 떠올랐다. 상례가 예(禮)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이 시대에 예의 회복을 위한 의례(ritual)의 후보군으로서 식탁[禮始於食飲]을 언급하시기도 했다. 존재론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지 못하는 시대, 예가 상품 서비스로 대체되는 시대, ‘공대할 타자’로서의 ‘어른’이 일상에 부재하는 시대다. 예라는 형식을 매개로 물질과 다르게 개입하며 인간성(초월성)을 창발하고 전수한다면 ‘공대할 타자’의 실종은 인간성을 잇는 매개의 실종과 별개일 수 없다. 그러나 ‘나라도’ 어른(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형식적 삶이 매개로서 요구된다. ‘규칙이 너를 구원하리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새긴다.(독하)
4.5.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중국에 추원(追遠)이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는 멀리 있는 것을 쫓는다는 뜻인데, 동양에서는 이것이 바로 예(禮)이고, 서양에서는 교양(Bildung)입니다. 자기 전통과의 대화에서 동양에서는 예가 나오고 서양에서는 교양이 나오는 것이지요.” (유재)
5. prudentia와 eloquentia
선생님께서는 prudentia와 eloquentia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prudentia가 지혜있는 조심, 내적인 미덕이라면 eloquentia란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는 능력 즉, 외적인 미덕에 해당한다고 하셨습니다. 얼마전에 경제전문 주간지 자기개발 코너에서 회사나 공무원사회에서 중간관리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점 중에 하나가 바로 '피드백공포증'이라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요즘은 예전처럼 상명하복식의 단순하고 권위적인 의사소통방식은 유효하지 않습니다. 특히 중간관리자들이 비평 혹은 피드백을 해야할 때 말을 꺼내기 전과 후에 신체적, 정신적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자신의 업무효율이 눈에 띄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저 역시 이 기사를 읽고 공감을 했습니다. 상관이나 윗사람의 지적에 응해서 말하는 것은 오히려 수월합니다. 하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부하직원(팀원) 혹은 mz세대 직원들에게 비평 혹은 피드백을 할 때는 그날의 기분, 업무효율, 컨디션까지 요동을 칩니다. 하지만 불편한 것이 두려워 아무 말도 안 하고 방치하고 방관만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 선생님께서 조심하는 마음을 지키면서도 할 말을 야무지게 잘 할 수 있는 미덕에 대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피드백 혹은 비평을 하는 자리에서 prudentia와 eloquentia를 모두 견지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위해 어떤 공부 어떤 훈련을 하면 좋을까요? (수연)
6. ‘학인’으로서 공부하기
교재 공부 시간, 니체의 개념들을 유난히 부드럽게 풀어낸 듯한 교재에 대해, 나는 '동무'나 '사린'을 연상시킨다는 '안이한'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한 선생님의 명료한 가르침에 뿌옇던 한쪽 눈이 떠지는 듯했다. 학인의 엄정함과 부드러운 꾀, 이 두 개의 눈을 모두 뜨게 될 계기로 삼기로 한다."'닳았다!', '좋아!' 이런 발화는 상당히 안이한 발화입니다. 심지어 마음의 폭로이기도 하지요. 안이한 발언으로 사는 일반인이 아닙니다. 학인은 조심해야 해요. 오히려 끝까지 안 닮았다고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학인은 까다로워야 합니다. 공부는 '차이를 많이 아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차이 나는 것을 잘 파악해야 합니다. 닮은 것을 잘 파악하는 것은 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