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회 속속 복습 문장 모음
1. 연이정, <굴에서 얼보기>
겉을 보고 속을 아는 조감(藻鑑)능력을 훈련한다. 조감은 직관이지만 식견과 경험의 누적에 따른 인식-패턴지(智)-이므로 배울 수 있다 하셨다. 훈련을 통해 미(美)에 가려진 진(眞)과 선(善)이 어떻게 결합되어있는지 잘 살피는 게 요령이라 하셨다. 가까운 것을 보고 멀리를 알고, 겉을 보고 속을 알고, 남이 알지 못하는 것 미리 아는 것이 성인(聖人)이라면 우리의 공부가 그 길을 지향하는 훈련이라 할 수 있겠다.
2. 숙비
“자기의 공부안됨을 한탄하는데, 괜찮아! 열려있으면 돼요. 당장 공부가 안돼도 괜찮아요. 공부는 오래하면 반드시 성취가 생기니까.”
3. 상인
3.1. "특정 공부 과목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것에 열려있을 것, 열린 마음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3.2. "선생님께서 Adorno를 어떻게 소화하고 배치하셨는지를 알고 싶어 선생님 책 색인을 참고해서 Adorno가 언급된 본문을 찾아 보았습니다.(는길)". 좋은 방법으로 보인다. 시도해 봐야겠다.
4. 유ㅅㅈ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는 말을 되새기며, 암송을 통해 생각을 떨쳐버리려 한다는 아무의 말에 선생님께서 응하여 말씀하셨다. "잡념이 들 때 여러 생각 중에서 하나의 생각만 해보는 것도 좋다. 하나의 생각을 길게 풀어 나가면 어떤 생성을 가져오고, 어떤 생각이든 오래하면 작품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동안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그 방면에 탁월함이 생기고 어떤 기적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그 일에 생각이 포함될 수 있다는 말씀에 슬며시 희망을 품었다.
5. 단빈, <개입/장소감>
"둘을 닮았다고 하는 것과 닮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개입의 차이입니다. 차이속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오해가 생기기도 합니다.
place-ness는 내부의 자율성을 가지며 거하는 것이라면, space는 자율성을 가지 못한 채, 기능에만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자기의 문제입니다. 내가 잘났으면 장소가 되는 것이고, 못났으면 아무리 좋은 곳이라도 장소가 되지 못합니다."
6. 는길
“‘생각’이 아닌 ‘글쓰기’는 남의 얼굴, 사태, 사건 같은 것에서 출발합니다. 무엇인가가 발생했고 이를 해석하려는 것이 출발입니다. 타자를 통과하고 우회하는 것이지요. ‘형식’도 우회하는 것입니다. ‘문학’도 우회이고 ‘예(禮)’도 우회인데, 인간은 반드시 경유합니다. 직접 알지 못하고 직접 만나지 못함으로, ‘우회’라는 애씀을 부립니다. 여러분도 공부하면서 스스로 우회하는 길을 개발하세요.” 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고, 이후 교재 공부 시간에 다시 “우회”가 등장합니다. 현상계 너머의 처리가 서로 달랐던 칸트와 헤겔을 설명하시며 덧붙이시기를, “헤겔의 정신(Geist)은 가만히 자기의 체계를 가지고 외부를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자체가 밖으로 나가 타자를 경유/우회하면서 역사적 맥락을 통하여 통합에 이릅니다. 헤겔에게는 이 모든 과정 자체가 진리가 됩니다.”
7. 독하
두 가지 말씀을 되새긴다. ‘형식이 없으면 정신은 어지러워지고, 형식을 고집하면 정신은 어그러진다‘, ‘심오한 사상(부처)과 담박한 사상(공자) 사이에서 적당함을 유지하며 자기의 길을 찾아라’.
무형식(디오게네스)에서 뒤늦게 형식(공자)의 길로 들어선 내 공부가 길래 이어지려면 형식의 적절함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선생님을 좇아 배우며 체감한 것이지만 심오함이나 담박함은 내용에 의해서만 결정되지 않는다. 내용이 전부라면 반복하며 배우고 익힘으로써 같은 내용이 다르게 다가오는 자득의 길을 설명할 수 없다. 몸(형식)의 변화가 정신(내용)의 불확정성을 결정짓는다. 이로써 ‘보이지 않는’ 타자의 정신을 배우는 길은 ‘보이는’ 타자의 형식을 배우는 길로 우회할 수밖에 없다. 형식의 겹침이 정신의 겹침을 이끈다.
8. 임ㅁㅇ
8.1. 피부란 무엇인가. 호흡법에 의하면 피부호흡이라는 것이 있다. 신선 중에 수선(水仙)이라는 존재가 있는데, 물에서도 호흡을 한다고 한다. 또 과학계에서는 양서류가 그렇듯이, 인간도 모공을 열어 호흡을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이 무엇인가’의 문제와 연관하여 주목해 볼 만한데, 피부도 중요한 응하기라는 것이다. 사람은 피부를 통해 응해왔다. 피부라는 ‘장’을 통해서 타자를 만나왔다. 일본말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아리가토-고자이마스)’에서 ‘あり(아리)’는 ‘있다’, ‘がとう(가토-)’는 ‘어렵다’라는 뜻이다. 이것이 ‘고맙다’는 말인 것. ‘미안한 존재’라야만 가능한 인사가 아닌가. ‘내가 네 앞에 있는 것이 떨리고 미안하다’는 존재. 이런 존재는 피부가 필요하지 않을까. 내가 살로 존재할 때, 이것은 ‘존재의 어려움’에 대한 호소다.
8.2. 글쓰기도 ‘우회’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지만, ‘형식도 우회’라는 것은 짐승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라틴어 격언중에 이런 표현이 있다. “Ex nudo pacto Actio non nasitur 벌거벗은(형식이 없는) 계약으로부터는 그 형식이 발효하지 않는다.” ‘형식’을 가지고 계약을 해야 그 실효가 있다는 말이다. 문학도, 예(禮)도 우회이고, 인간의 모든 애씀은 우회의 길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우회하는 길을 ‘개발’해야 한다. 내 길은 어떤 우회가 필요할까. 물론 이 길을 가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고 또 금방 자득이 생기진 않지만, 그럼에도 반드시 경유해야 한다. 다른 길이 없다. 반드시 경유해야 한다. 그것이 인생길이다.
9. 김ㅅㅇ
선생님께서 슬퍼하는 것과 우는 것도 법도에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동학 미애씨의 이별례에 대해 비평하셨습니다. 너무 슬퍼하거나 너무 반가워하거나 너무 좋아하는 것을 그대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습니다. 저 역시 매사에 너무 슬퍼하고 너무 분개하고 너무 낙담하고 너무 좋아하고 너무 기대하면서 그것을 언행과 표정에 투명하게 다 드러내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공부자리에서 선생님과 동학들의 품행에서 배운 형식과 법도를 모방해 앞으로 중용을 지키는 차분한 사람으로 성숙하고 싶습니다.
10. 조ㅇㄴ
"인간이 짐승이 아니다는 증거는 바로 우회한다는 것입니다. 문학이 좋은 예이지요. 인간은 절대 직접 못 갑니다. 반드시 경유하는 게 인생입니다. 스스로 우회하는 것을 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우회가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세요."
이 말은 영광씨 강연 후에 말씀하셨던 인간 세계의 3이라는 숫자에 대한 문제와 암연이장 "바보를 하늘처럼 치어다 보는 자, 당신의 이름은 불행이어라"라는 문장 후 말씀하셨던 "내가 쳐다본 사람이 누구였느냐를 한번 생각해 보라는 말씀과 연결되었습니다.
제가 늦게나마 선생님을 바라보며 공부할 수 있음에, 동학들을 통해 저를 만날 수 있음에, 장숙이라는 공간을 통해 깜냥을 점검할 수 있음에 그리고 저를 돕고 있는 이 모든 것에 기대고 있음에 감사했습니다.
11. 유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10세기에 활동한 ‘장방평’이라고 하는 유학자가 있는데, 그는 ‘중국의 유학이 불교로 인해 바뀌는 시대의 도래’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유교는, 가르침이 너무 담박하다, 그러니까 이 가르침을 수습한 이후에 여기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이 말은, 유교가 너무 쉽다는 게지요. 배우고 싶은 건 너무나도 많은 데, 마음을 계속 둘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불교는 심오하니까 마음을 둘 데가 있어요. 이른바 신유학, 주자의 유학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너무 좋은데, 너무 담박하기 때문에 여기에 오래 있지 못하고, 심오하기 짝이 없는 불교사상을 수용해서 마침내 거대한 유학을 만든 것이 16세기 이후의 유학인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심오한 것과 담박한 것을 어떻게 배치하면 좋을까요?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모든 어려운 글은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가령 아도르노처럼, ‘쉬운 글쓰기, 쉬운 이론에 저항하라’고 말합니다. 둘 중 어느 것이 우리의 것일까요? 맞는 것, 완벽한 잣대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지 말고, 자기의 인생, 자기의 깜냥, 자기의 관심을 가지고서 선택해야 하겠지요.”
12. 아무
형식은 저절로 벗겨지는 단계까지 하는 것이다. 벗겨지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입어야 된다. 그것이 우회이다. 옛날부터 공부는 그렇게 해왔다. 형식을 갖지 않으면 어지러워지지만 형식을 고집하면 어그러진다. 어지러워진다와 어그러진다를 함께 잘 생각해야 된다. 하나의 형식이 영원한 진리는 아니다. 해보고 아니면 자꾸 교체해야 된다. 그 둘 다를 잘 기억해서 자기 몸에 맞는 내 생활에 맞는 형식을 잘 개발해야 된다.
잡념에 시달 때도 잡념에 옮아가지 말고, 하나의 생각을 갖고 그 생각으로만 계속 나아가 보자. 오래 묵힌 생각은 반드시 개념으로 탄생한다. 평소에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하나의 생각을 길게 품어가면, 기왕에 알려져 있는 좋은 개념들을 이용하기도 하겠지만, 어떤 생각이 생기면 무조건 버리지 말고 오래 가지고 다니면, 그게 작품이 되기도 하고 인생관이 되기도 하고 또 새로운 개념과 연합되기도 하니 길게 품어 보는 그런 생각은 괜찮을 것 같다.
13. 김ㅁㅇ
지난 속속에서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공부하기 위해서는 ‘꾀’가 필요하다. 공부는 기존의 습관과 관성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때 불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일어나는 불화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불화를 생산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또한 꾀가 필요하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의 삶과 공부에서의 꾀는 무엇이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꾀의 의미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또 공부란 기존의 습관과 관성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인데, 안전한 곳을 벗어나 새로운 것을 마주하는 공부, 그런 공부가 기대되고 설레는 마음도 있지만 동시에 막연하고 막막하며 두렵기도 하다.
14. 여일
14.1. 자기소개 중에 꿈의 해몽과 현실에서 일어난 동시성을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어떤 말씀으로 응해주실 지 살짝 기대를 했었다. '자득이 없으면, 물신(物神)으로 과도하게 쏠리기 쉽다.' 는 선생님의 말씀에 그만 얼굴 들기 민망하였다. 생활양식을 견고히 하지 못한 채 엉뚱한 것에 관심 두는 제 민낯이 낯뜨거웠다.
14.2. 아도르노를 통해 '계몽은 왜 자기파괴로 이어지는가'를 살펴보았다. 계몽은 신화를 벗어나 자연을 지배하게 되지만, 계몽된 이성은 다시 인간을 억압하고 파멸에 이르게 한다. '전체는 비진리다.'는 말처럼 동일자로서 계몽은 모순, 차이, 대립을 받아들이지 못해 억압과 폭력을 만들어낸다. 자기파괴를 불러 일으키는 계몽과 전체성에 대해 아도르노는 끊임없는 비판과 자기 반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자기 반성에는 자율적인 주체 형성이 요구된다. 선생님은 인간 내면에 자율성을 가지면 장소감을 얻지만, 자율성이 부재하면 공간의 기능에 종속된다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각자 자율성을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