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이정
①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을 자기 내면화 하는 것. 죄책감은 자기 안의 양심이 기준이 되는 것인데 내 관심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방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이 말은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 하는가 와도 연결이 된다. 나는 내 양심으로 내가 옳거나 그르다는 판단을 하는 내 안의 가치 판단이 중요한 사람인가? 바깥에 있는 타인의 시선 평가 판단 기준이 중요한 사람인가? 우리 안에 수치심과 죄책감은 모두 갖고 있다. 관심의 방향을 잘 살펴 수치심도 죄책감도 자기 정신이 자람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잘 배치해야겠다.
➁ ‘내용이 형식으로 나아가야만 바뀐다.’라는 말은, 반복을 통해 내용이 깊어지면 형식이 생기고 형식에 대한 메타 인지적 성찰이 생겨 그 성찰성 때문에 형식에 의무를 갖게 된다. 이것은 알기의 과정을 거쳐 되기로 가는 무한반복 과정이다.
2. 지린
속속을 시작할 때 세 번째 교가를 다시 배웠다.
속속이 끝날 때 배웠던 노래를 다 함께 불렀다.
안 부른 숙인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지난 번 속속에서도 세 번쩨 교가를 다함께 불렀는데,
그때 나도 입을 다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노래 부르는 것이 낯설고 이상했다.
그러나 지난 속속에서는 함께 부를 수 있었다.
그렇게 부를 수 있게 된 다음에 나는 세 번째 교가가 좋아졌다.
"나는 학교다."
이 문장을 나 스스로에게 줄 수 있어서 기뻤다.
*
k팝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고들 하는데,
나는 노래가 우리 일상에서 떠나버린 것 같을 때가 많다.
그래서인지 속속에서 처음 노래를 부르거나
다른 사람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었을 때
낯설고 이상했다.
종교적인 느낌이 들었는데,
사람들이 말을 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기 훨씬 전부터
홀로 부르는 노랫소리가 있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었다.
노래는 아주 오래된 소리인데,
이제 사라지고 있었던 거다.
*
"초나라 음률은 슬프고 애절해서 때로는 오열하는 듯 흐느끼는 듯 했고,
때로는 애원하는 듯 원망하는 듯했다. 누가 들어도 초나라 노래임을 알 수 있었다."(255쪽)
교재의 위 구절을 읽을 때는 초나라 노래가 무척 궁금했다.
장량이 굴원(초나라 시인)의 시를 노래하게 했다는 대목(256쪽)으로 미뤄보면,
詩는 곧 노래였다고 짐작해 볼 수 있다.
258쪽에서는 항우가 우희를 잡고 슬프게 "노래"했다고 적혀있다.
"항우가 슬프게 노래를 부르자 우미인도 일어나 화답했다."(259)
哭은 울다라는 뜻과 함께 노래하다는 뜻도 있는데,
나는 어려서 여인들의 哭을 들었다.
그녀들의 哭은 사설이 분명한 노래였으며 울음이었으며 詩였고,
슬픔을 흘러내보낼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었다.
교재 329쪽 '상산사호'를 소개하는 문장에는,
"일이 없을 때 이 노인들은 상산에서 「자지가紫芝歌」라는 노래를 불렀다."가 있다.
이 때는 신선들도 일이 없을 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는 지금과는 다른 곳에 있었다.
3. 김ㅅ연
"Meet the adversity with a cheerfulness" 명랑함으로 시련을 맞이하라.
"진정한 실력은 바로 그 슬럼프가 왔을 때 드러나는 법이다."
" 페스티나 렌테(Festina Lente) 천천히 서둘러라."
- 호흡을 느리게 하는 훈련을 꼭 해야 한다.
이번 속속 수업 이후 사무실에서 근무 중에 가슴이 답답해지거나 슬럼프로 무기력함을 억지로 견디고 있을 때
이 세 문장을 반복해서 마음 속으로 되뇌이고 호흡을 천천히 하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유튜브에서 사람의 목숨이 오고 가는 위험한 임무를 맡은 특수부대 요원들의 심리를 훈련했던 전문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매우 위험한 임무 투입 전에 특수한 호흡법으로 군인들의 긴장을 완화하고 침착하고 평온한 상태를 만드는데
이 호흡법이란 것이 매우 천천히 다섯 번에 걸쳐 끝까지 숨을 들이마시고 아주 천천히 숨을 뱉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호흡을 다섯 번만 하면 심장박동수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그 어떤 긴장상태도 침착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호흡을 길고 느리게 하는 훈련과 노력을 통해 일상에서 천천히 서두르고 슬럼프가 왔을 때도 명랑하게 제 실력을 드러내는
제 모습을 기대해봅니다
4. 단빈
"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가이소에서 한 소인(素人)이 했던 질문에 대해, 단보 선생께서는 쉼은 산책할 때 정도이며, 24시간 전체를 공부의 맥락에 두어 잠자는시간 조차 공부시간으로 삼으시는 실천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쉬는 시간이 공부할 때와 단절되지 않고, 쉬는 것과 일하는 것의 차이가 없는 지점'은 곧 생활 전체가 공부의 현장이 됨을 말합니다.
쉼과 일, 혹은 공부가 차이가 없는 지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에너지의 적절한 배분이 수반되어야 할 듯 합니다. 에너지를 고르게 배분하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다면, 쉼과 공부의 경계를 허물고, 무엇이든 빠르게 해내려는 서두름도 잡을 수 있을 듯 합니다. 공부와 쉼이 겹을 이루지 않고 하나로 통합되어 '무왕이비공부(無往而非工夫)' 가 완결되는 생활을 희망해봅니다.
5. 숙비랑
흥미로운 것은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오해가 혹은 견해의 차이가 ‘범주의 오류(단보선생)’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범주를 상정할 때 개입된 항목은 그 실천현장을 매개하는 무엇(들)이다. 사회주의자와 시장주의자 사이의 범주 오류,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사이의 범주 오류, 이타주의자와 이기주의자 사이의 범주 오류, 그리고 여성과 남성 사이의 범주 오류. 한 장소에 앉아 차(荼) 한 잔을 나누는 사이(時/間)에도 통합되지 않은 상이한 범주가 난무 할 수 있다. ”말은 한국말로 하지만, 전시를 할 뿐이지 소통을 통해 말이 비근해지는 느낌이“(단보선생)들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갈등의 구조가 민낯처럼 현실세계에 드러날 땐 조금 더 깊은 고민을 불러 일으킬 거다. 스스로를 조금 뒤로 물리고, 눈 앞의 상대를 조금 더 살피며, 조금 더 현명한 범주를 잡는 것은 어떻게 가능해질까. 풍경이 불러 일으키는 표정과 말씨들 사이에서 (조심한 운신으로)‘해석을 유예’할 때, 우리는 ‘이타성이라는 상처로부터’ 조금 더 물러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현명해질수 있을 것이다.
6. 김ㅁ아
형식의 중요성에 대해 지금까지 많이 들어왔지만 게으른 나의 몸과 마음은 내 생활의 형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속속에서 자신의 생활을 바꾸려 하지 않는 자세에 대한 K선생의 말씀은 공부는 곧 형식의 반복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했다.
K선생의 말은 곧 나의 생활에 대한 직설적인 외침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속속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어떤 형식을 지니며, 반복할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기차 안에서 일어난 작은 일들에 시선을 빼앗긴 나머지 그 다짐은 까맣게 잊은 채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근무를 하고 이어지는 연휴에 아무런 형식 없이 지낸 나는,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이 바람에 흔들리듯 휘청거리는 것을 경험했다.
연휴동안 가족들의 말과 분위기를 살피느라 나의 마음은 지쳤고, 평소 나의 패턴과 맞지 않는 음식으로 인해서 몸이 무거워졌다. 또한 연휴를 지나고 나니, 하나의 일에 집중 하지 못하며 분산되는 나의 정신을 보았다. 돌아보니 형식이 없어서 모든 시간을 흔들리며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선 장숙의 5術부터 내 생활에 형식화 해보았다. 요즘 나는 일어나서 주천을 하고, 귀가해 씻기 전 단중을 한다. 자기 전에 복기를 하려고 하나 늘 마치기 전에 잠에 든다. 아침에 학교 혹은 직장에 도착해서 오전 시간에 추변을 1회 한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 15분 정도의 산책 시간을 갖고자 했으나 15분의 시간 내기가 참 어렵다. 또 이와 더불어 만든 두 가지 형식이 있는데 직장이든 학교든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정해진 텍스트를 읽고(종교 텍스트) 하루를 계획한다. 자리에서의 마무리로는 하루 내 몸, 마음, 정신을 돌아보는 짤막한 글을 쓰는데, 이 글은 컴퓨터로 쓰는 것이 아니라 노트에 좋아하는 필기구로 쓴다.
붕 떠 있고 어수선한 일상들이 조금씩 달라지는 경험을 한다.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정신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상태이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내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형식의 반복을 통해 공부하는 숙인의 자세를 삶 속에 내려앉게 하고 싶다.
7. 아무공
단보선생은 과거에 젊었을 당시에 전설로 불리셨다는 말이 있다.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데 그렇게 표현을 하는 것은 그때 당시 다르게 살고 계셨기 때문에 그런 말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시면서 다르게 살기(삶의 형식)에 대해서 한 번 더 말씀을 해 주셨다.
아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공부가 깊어지면 내용의 화려함 보다(소실되고) 형식(삶의 태도)이 드러나 보인다. -내용은 알맹이(진짜 나)이고 형식은 겉모양(가면)인 것이 아니라 -
주체는 본질적이 아닌 생성적이다. 주체는 타자와의 상호 개입으로 인한 관계 속에 사이 존재로 연극적 실천을 통한 변증법적 존재 생성의 길 위에 있다. 장숙3계로 누구孰가 되기 위한 끝없이 주체적 행동 방식(형식) 만들어 가는 길을 이어가고 있다. 장숙에서 공부하면서 항상 기억을 해야 될 것은 형식이 전부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내용은 공부가 아니다. 내용으로서 내 생활을 바꾸지 못한다. 내용도 형식이 될 때 공부가 되고 자기를 바꾸게 된다. 공부는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식으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8. 임ㅁ애
"장량은 '앎을 주는 자'였고, 유방은 '알아주는 자'였다. 앎을 준다는 문제와 더불어서 실상 더 중요한 것이 '알아준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과도한 평등주의와 자유가 횡행하는 현대의 인간관계에서, 타자의 실력에 대한 공정한 이해나 알아줌이 빈약해졌다. '알아서 준다'라는 이 말의 특이성을 생각해 볼만하다."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곱씹어 본다.
각자도생의 시대, 누군가를 '알아준다'는 태도는 어느새 오지랖의 낙인을 달게 되었다. 타자에 관한 관심이 곧 내 존재에 대한 환대로 돌아온다는 것은 이미 검증된 지혜가 아닌가. 그러나 조심하지 않으면, 음흉한 계산이나 뻔한 목적을 숨기고 있다는 의심부터 받아야 한다. 특별한 실력을 알아볼 수 있는 주체는 희귀 보호종이 되고 있다. 보편적인 주체들은 시대의 바람에 휩쓸린 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집이나 차, 외모로만 서로를 알아봐 줄 수 있을 뿐이다.
'알아봐 준다'라는 말의 특이성이란 무엇일까? 우선 '인정'이라는 개념이 떠오른다. 그러나 사실 '인정'이라는 말로는 '알아준다'라는 태도의 깊이를 다 담을 수 없다. '알아준다'라는 말을 단순히 '인정투쟁'으로만 이해해 버린 현대사회의 편협한 시각이, 공교롭게도 인간의 관계를 빈약하게 만든 부작용으로 작용한 것은 아닐까. 사회적 권리나 제도적 의무로서 인정을 다루면서,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듣기 좋고 말하기 좋은, 실체 없는 환상의 편리함에 취해 버리고 만 것이다. 누구나 인정받을 보편적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는 제도로서 보장할 수 있다는, 이토록 쉽고 명확한 계약의 체계가 그 환상을 떠받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상대를 공정하게 이해하거나 알아주는 일에는 지난한 비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권리니까 해준다'는 식의 건조하고 단순한 계약관계 쪽이 훨씬 편리하다. 환상은 언제나 현실보다 쉽다.
모두가 잘났다고 착각하는 시대를 살면서, 모두가 인격적인 환대도 원한다는, 아이러니. 그 불가능한 환상을 좇느라, 서로 '알아봐 줄' 능력은 실종된 캄캄한 사회에서, 과연 '실력을 펼칠 판'이 열릴 수 있을까? "생산적 권위"와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주체가, 모두 희귀 보호종이 되어가는 현상은 닮아있다. 모든 신도와 관객은 쉬운 환상으로 몰려가 버렸는데, 신도가 없는 종교가, 관객이 없는 연극이 가능할까?
장량에게 유방이 없었다면, 서로를 알아봐 준 성장과 창조의 판은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저마다 특별한 개인이기를 열망하는 지금, 누군가를 알아볼 안목과 실력에 주목하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다. 진정한 실력이 펼쳐질 시공간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문제는 곧,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9. 조ㅇ남
이번 속속은 다시 한번 “형식의 중요성”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단보선생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래 공부하면서 스스로 새로운 선을 긋는 기회가 생기기를 바랍니다. 3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나는 스스로 자득을 얻고 있는가. 둘째, 동학에게서 신뢰를 얻고 있는가. 셋째, 자기와의 싸움에서 신뢰를 얻고 있는가. 살면서 자기를 넘어가고, 증명하는 방식은 질기게 나만의 형식을 갖추며 살아보는 것입니다.” 매번 단보선생은 형식을 강조하셨는데, 그 중요성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요즘 몸과 마음을 여러 형식에 맞춰보는 실험?을 하고 있는 와중이어서 이 말씀이 더 깊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하루의 계획과 반복, 그리고 어그러짐을 통해 나의 가려진 모습을 대면하고, 그 길 에서 타자를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형식으로 만나고 있었고, 그 형식을 배우고 재 조정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쉬는것과 공부가 차이가 없다는 단보선생의 말처럼, 몸과 마음 이 통합되어 삶 자체가 스스로를 구제할 수 있을 때까지 공부하고 싶습니다.
10. 박ㅇ름
장숙 공부 모임을 위한 삼계를 다시 한 번 새기는 순간이 있었다.
① 각자가 이 집을 짓고 있는가? 허물고 있는가?
➁ 동학에게서 나는 신뢰를 얻고 있는가?
➂ 자기와의 싸움에서 자득을 얻고 있는가?
삼계를 새기던 중에 '자득'에 대한 단보선생의 말씀이 마음에 남는다. 단보선생은 자득은 "다른 희망을 갖는 것이고, 내가 바뀌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책을 많이 읽고 이론 공부를 많이 하고 많이 알기만 해서는 생기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단보선생은 "형식이 전부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라고 말씀하시며 이날의 공부 교재였던 '장량'을 예로 들어 장량이 뭘 했느니 그런 걸 아는 것은 시험을 치기 위한 용이고 그것을 백날 해봐야 자기 생활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하셨다. "반드시 내용을 형식으로 옮아가야 한다."라고 하셨다.
더하여 이날 장량 책으로 조별 토론을 하던 시간에 우리 조는 "인문학 공부가 내 삶을 어떻게 밝히고 있나?"라는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하는데, 인문학 공부를 하다 보면 내 삶에 도움이 되는 '문장'을 많이 얻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혹은 장량 책 속에서 장량이 꾀를 발휘했던 많은 상황들을 접한 것처럼,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을 얻고 미리 그 상황에서의 내 모습을 예상해 볼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는 것 같다. 좋은 문장들과 간접적인 경험으로 얻은 것들이 실제로 나를 통해 내 일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형식을 잘 꾸려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11. 권ㄷ환
속속의 복습의 복습문장입니다. 쑥쑥에서 나눈 대화(내용이 깊어 형식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바탕으로 적었다는 의미입니다.
"신뢰를 위해서는 오래 만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무얼 해야 하나. 무얼 할 수 있는가. 어떤 내용 혹은 어떤 형식을 취해야 할까. "때로 실수도 있고 오해도 하는 것이 사람인데, 때로는 어떠어떠한 이유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런데 믿음은 때로 신뢰처럼 결과처럼 막연해 보이기도 하기에(때로 믿기 힘든 상대를 믿기 힘든 말을 믿기 힘든 사건을 믿자! 한다고 믿음이 바로 생기긴 요원하니) 신뢰를 위한 길에 또 다른 연극적 실천이 있을까 생각해 보면, 경청이 아닐까 싶다. 경청이란 실로 만만치 않은 연극인데, 그저 누군가의 말을 가만히 듣는 듣기가 곧 경청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가만히 듣는 것을 넘어서, 그 사람의 언어와 몸짓으로 나타나는 표현을 내 생각과 멋대로 정리하지 않고 상대가 사고하는 프레임 그대로 들어가 그 출발점에서 같이 사고해 보는 것인 만큼 에고의 요동침을 견디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경청은 꼭 믿음과 같은 효능을 나타내는 듯한데, 우리는 누군가를 믿을 때 그 사람의 말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그 상대의 생각과 판단을 온전히 받아들이곤 하기 때문이다. 경청이라는 연극을 오랜 시간 "반복"할 때 눈 먼 중이 마 캐듯이 어느 날 시골 처녀 자란 것을 모르듯이 신뢰가 다가오는 것 아닐까? 그런데 그것은 "시골 처녀의 성숙이 제 3자에 의해 발견되듯"이 다른 동학들이 평가해 줄 것이다. "신뢰란 것이 의도를 갖고 쌓는다고 쌓아지는 것이 맞기는 한지" 싶은데, 그것이 신뢰와 정신이 우리가 추구할 위대한 가치라는 것을 꼭 증명하는 것 같다. 자기가 성장한 것은 에고가 모르고 더 큰 정신이 아는 것과 같이, 신뢰 또한 나도 모르지만 심지어 남들도(!) 모르게, 타자가 나를 신뢰를 해야만 할 수 있는 눈빛과 말투와 행동이라는 행동(형식)으로 드러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누군가를 믿기 위해 상대의 말을 유심히 듣는다는 연극은 정말 상대를 위한 것일까? 이상적인 연극은 관객과 배우 중 누구의 인생을 바꾸는 걸까?
12. 소ㅇ광
장량은 “천하통일의 위업을 이뤄내어 크게 통합된 한 마음을 갖게 된 첫 번째 사람”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는 이른바 “통합된 대륙과 마음”을 성취해 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량의 지혜는 “통합된 대륙”의 지평, 곧 “마음의 경계”의 규모에서 구성된 것이라고 여겨도 좋을 듯하다. "황제의 마음"(지린)을 상상해 보는 일이 그 자체로 지혜의 열린 체계에 기여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가톨릭'을 자처하는 서구 그리스도교 신학의 출발점도 '신의 마음'을 상상적으로 가늠해 보는 일로써 전개된다. 그리스도교 신학이 너무나 손쉽게 우주론적 규모로 도약(실은 비약)할 수 있는 비결도 이른바 우주적 황제의 마음을 상상해 보는 일, 가령 신적 관심과 자비의 마음을 상상해 보는 데 있다. 그런데 장량은 ‘꾀’로써 ‘정태적인 보편성’에 함몰되지 않는 지혜로 옮아간다. 반면에 제국주의의 국교로서 기능해온 기독교는 ‘자기 문법에서만 성립하는 보편성’을 고집함으로써 스스로 게토화의 길로 졸아들고 말았다.
한편, 황제의 마음이나 신의 마음 등 나보다 더 큰 타자, 혹은 더 높은 차원의 시선에로의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마음의 경계’를 넓히는 방식과 달리, 보다 수평적으로 마음의 경계를 확장하는 방식도 있다. 가령 주디스 버틀러는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에서 “동맹의 규모가 객관성의 규모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즉 객관성이나 보편성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범주 상으로 더 포괄적인 사태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정치적인 동맹과 연대에서 어렵사리 성취된다. 여성이나 성소수자처럼 주변화된 자리에 내몰린 사람들이 수평적으로 동맹을 맺고 연대함으로써 중심적 위치에 있는 강자들의 세계를 에워싸는 더 큰 시야를 조형해 나갈 수도 있다.
13. 여일
① 처음에는 장량이 왜 항우가 아닌 유방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제갈량은 유비의 삼고초려에 응하지만, 장량과 유방의 만남은 심심하다. 다만, 유방이 장량의 병법을 잘 이해하고 알아준 것이 장량을 감명케 한 것 같다. 장량은 ‘제왕의 스승’, ‘모성(謀聖)’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책략가이다. 그의 책략은 일이 되게 하는 데 있어서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또한 일의 성취에 따른 보상에는 별다른 세속적 욕망이 없는 편이었다. 한 때 망국의 한으로 복수를 꿈꾸던 시절을 보내다가 우연히 황석노인을 만나 책 한 권을 얻는다. 이 책을 10년 동안 붙잡고 공부한다. 마침내 장량의 책략으로 4-5년간 이어진 초한전쟁을 승리하고 천하를 얻는다. 황석노인이 마치 시비 걸 듯 장량을 여러 번 시험하는 것을 통과하고 황석공의 책을 10년 동안 공부하는 장면이 무척 인상 깊었다. 십년은 단순히 긴 시간이 아니라 선생 혹은 책을 절박하게 사무치게 만나는 시간들이었다.
➁ “내용에서 형식으로 나아가야 바뀐다. 형식은 개인의 생활양식이기도 하지만 우주의 이치이기도 하다.” 쑥쑥에서도 내용과 형식의 차이에 대해 서로 논의가 분분했다. 같은 문장을 두고 각자 이해하는 바가 다르고 설명하는 언어들도 다 다르다. 개념 혹은 공부는 닫힌 세계가 아니 열린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용은 지행知行이라면 형식은 행지行知로서 생활의 수행성이 필시 요구된다.
“君子役物 小人役於物. 군자는 심심함을, 침묵을, 아이스크림을 잘 부린다. 소인은 심심함에, 침묵에, 아이스크림에 도리어 부림당해 가난하다.”고 설명하며 단보선생은 언젠가 휴대폰을 불태우자는 농담을 하였다.
14. 는길
“跂而望登高山卽見天地大也”
속속 강의 중에 배운 문장입니다. 高山에 오르면 천지가 얼마나 큰지 볼 수 있다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高山에 오르려는 이는 base camp를 높게 친다는 말씀을 누 차례 하셨습니다. 고산에 오르기 위하여, 저와는 높이가 다른 base camp를 생성시키는 말들을 기록합니다.
① 쉴 때를 잘 가늠해야 無往而非功扶가 됩니다. 쉴 때와 공부할 때가 단절된 것이 아니게 서로 plus-feedback 관계가 되게 합니다.
➁ 혼자 있을 때가 공부의 실전이며 전선(戰線)입니다. 잘 때도, 긴장을 완전히 다 풀지 않아야 합니다. 꿈도 내 소관입니다.
➂ (완전히 긴장을 풀어서) 쉬어야 힘이 생긴다고들 하는데, 납득이 안가는 면이 있어요.
④ 우리 공부는 무엇을 안다는 것도 있지만 ‘다르게 살기의 싸움’입니다.
⑤ (여러분과 제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저는 공부에 모든 걸 다 투자한다고 하는 사람.
⑥ 자기를 넘어가는 경험에 대한 渴望, 渴愛가 있어야 합니다.
高山에 올라 이 세계가 얼마나 큰지를 보게 되면, 역으로 나의 작음을 알 수 있을까요. 내 꼴에 대하여 “외롭고 깊게” 울 수 있다면, 그 슬픔 속에 구제되는 것이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따금 증상처럼 공포스럽게 無/無限를 느끼고 일순 엄마를 잃은 아이가 될 때가 있습니다. 혹시나, 지난한 노동과 정성으로써 無/無限을 향하여 걸으면, 그 無/無限도 저를 대하는 얼굴이 변해 있지 않을까요. 어떤 공포로부터 저를 구제할 사람은, 다름 아닌 저 자신입니다.
15. 독하
"십년마일검(十年磨一劍)"
장량은 십 이년 창해군과 동방에서, 십 년은 하비에서 황석공의 태공병법에 담긴 타자성을 내재화하며 '낮은 중심'(단보선생)을 얻는 공부를 했다. 타자성에 다가가는 길은 조심성과 시간성을 매개로 겹침을 이루는 일이다. 애증의 패턴으로 고착된 에고라는 증상의 덩어리 외부에 서서 타자가 지닌 패턴을 굽어보고 겹침을 이루는 공부는 조심성과 시간성을 매개할 수밖에 없다.